[들어가며] 통일부에 출입하며 조선중앙통신과 노동신문을 읽기 시작한 게 2017년 4월부터였습니다. 때로는 어이 없고, 때로는 한글인데 무슨 말인지 모르고, 때로는 쓴웃음도 나오는 북한 뉴스의 세계로 초대합니다.
“조선로동당 위원장이시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무위원회 위원장이시며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이신 우리 당과 국가,군대의 최고 령도자 김정은 동지.”
북한 매체에서 김정은을 소개할 때 붙이는 길고 긴 수식어다. 특히 조선중앙TV에서 ‘특별한 일’(핵실험이나 미사일 발사 등)을 보도할 때마다 ‘분홍 저고리’를 입고 등장하는 간판 아나운서 리춘희의 목소리로 유명한 말이다. 리춘희는 저 단어들을 특유의 강렬한 억양과 커다란 목소리로 단숨에 읽어내린다. (현장감을 살리기 위해 두음법칙을 생략했다.)
김정은을 대체 뭐라고 불러야 할까. 북한에선 김정은의 직책을 왜 저토록 길게 붙일까. 이건 기자 입장에서도 헷갈리지만 외교 무대에선 정말 머리카락 쥐어 뜯을 정도로 복잡하다. 김정은은 3대 세습 독재자다. 정확히 부르자면 ‘왕’이어야 할 것이다. 북한은 김일성-김정일-김정은으로 이어지는 ‘김씨 왕조’니까. 하지만 그들은 ‘조선 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을 표방한다. 사회주의 체제의 공화국 틀에서 왕이란 있을 수 없다.
김정은의 직책을 전부 다 갖다 붙인 건 ‘왕이 아닌 왕’이란 아이러니한 상황을 반영하기 위한 북한의 고육지책으로 풀이된다. 당과 정부, 인민군의 모든 권력이 김정은 한 사람에게 몰려 있다는 뜻이다.
한국 정부가 김정은을 ‘국무위원장’이라 부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 때의 김정은은 정(政)의 대표자다. 삼권분립의 원칙상 대통령은 1차적으로 행정부의 수장이다. 이 때문에 그 많은 직책 중 국무위원장을 택하게 됐다. 미국도 마찬가지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이 김정은을 ‘체어맨 김(Chairman Kim)’이라 부를 때도 국무위원장이란 뜻이다.
겉으로는 왕이 아니지만 실상은 ‘신’처럼 군림하는 김정은을 북한 뉴스에선 어떤 방식으로 표현할까. 우상화다. 북한 매체에서 김정은을 우상화하기 위해 동원하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김정은이란 이름의 글자체가 다르다. 조선중앙통신이나 노동신문 등 주요 매체에선 김일성과 김정일, 김정은 등 이른바 3대 지도자의 이름은 다른 글자보다 훨씬 크고 굵은 고딕체로 사용한다. 이들 3대 세습 지도자의 이름은 특수문자로 인식되도록 자동 프로그래밍됐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온갖 화려한 미사여구를 붙이는 것이다. 가장 많이 쓰이는 말은 ‘경애하는 최고 령도자 동지’다. 문단마다 이 수식어로 시작한다. “경애하는 최고 령도자 동지”란 말만 걷어내도 기사 분량 중 적어도 5분의 1은 줄어들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원수님’이란 단어도 많이 쓰인다. 여기서 ‘원수’는 국가원수(元首)이자 북한 군 최고 통수권자를 가리키는 ‘공화국 원수(元帥)’(우리가 생각하는 ‘원수(怨讐)’는 ‘원쑤’라 표기)의 뜻을 모두 포함한다. 보통 ‘수령님’은 김일성을, ‘장군님’은 김정일을 가리킨다.
‘희세(稀世)의 천출(天出) 위인(偉人)’이란 수식어도 자주 등장한다. “세상에 드문 하늘에서 낸 위대한 인물”이란 뜻이다. 그런데 ‘천출’이 ‘천하게 태어나다(賤出)’과 음이 똑같아 쓴웃음을 자아내기도 한다.
지난 9월 평양 남북정상회담에서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이 함께 백두산 천지에 올랐을 때 김영철 당 부위원장 겸 통일전선부장의 ‘아부’가 화제였다. 김정은이 “춥다더니 춥지가 않네”라고 한마디 하자 김영철은 “백두산에 이런 날이 없습니다. 오직 국무위원장께서 오실 때만 날이 이렇단 말입니다. 백두산의 주인이 오셨다고 그러는 겁니다”라고 말했다. 교활하고 노회하기로 소문나 별명이 ‘승냥이’인 김영철이 73세의 나이가 무색하게 30대 중반의 김정은에게 연신 머리를 조아렸다. 그것이 북한의 현실이다. 그래야 살아남으니까. 북한 뉴스엔 그 현실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이미아 기자 mi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