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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황 속 호황…중고거래 시장
[ 임현우 기자 ]
“반찬 가게를 닫게 돼 처분합니다. 2년 썼고요, 상태 깨끗합니다.”
충남 천안의 자영업자 A씨는 인터넷 중고거래 카페 ‘중고나라’에 업소용 냉장고를 구입가의 반값인 50만원에 내놨다. 올 1~10월 올라온 업소용 냉장고 매물은 1만4300건으로 작년 같은 기간(8650건)보다 64% 증가했다.
이승우 중고나라 대표는 “집안의 쓸 만한 물품을 한꺼번에 내놓아 현금을 확보하는 개인회원도 늘어나는 추세”라며 “중고거래 시장은 불황일수록 활발하게 성장한다”고 말했다. 중고나라는 올해 전체 거래액이 지난해보다 10% 늘어 2조원을 기록할 것으로 예상했다.
내수시장의 ‘2부 리그’에 그쳤던 중고거래 산업이 고속성장을 이어가고 있다. 온라인과 모바일로 거래를 간편하게 연결해 주는 스타트업(신생 벤처기업)이 다양해진 가운데 ‘눈물의 폐업’과 ‘소장품 급처분’에 나서는 이용자가 늘고 있어서다.
스마트폰 기반의 중고거래 중개 앱(응용프로그램)들도 대목을 맞았다. 업계 1위 ‘번개장터’의 월간 순방문자(MAU)는 2014년만 해도 100만 명에 못 미쳤으나 지난달 355만 명으로 치솟았다. ‘헬로마켓’에는 1분에 4400개꼴로 새 매물이 올라오고 있다.
의류부터 업소용 냉장고까지…모바일장터 1분에 4400개씩 올라와
"눈물의 폐업처분" "소장품 팝니다"…중고거래, PC→모바일 대세 바뀌어
간편결제·블록체인 신기술 달고 '高高'…스마트폰만 있으면 간편하게 매물등록
중고나라 등 4개 스타트업이 주도…대기업·벤처캐피털도 투자 잇따라
미개봉 새상품·외식업소용 집기 등 틈새시장 노린 후발업체 속속 등장
오랫동안 소비 침체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일본에서는 중고거래 시장이 2년 새 두 배 가까이로 커져 2조1000억엔(약 22조1000억원) 규모에 이른다. 해외에는 일본 메루카리, 미국 오퍼업, 싱가포르 캐러셀 등 스마트폰 앱(응용프로그램)을 통한 중고거래로 대성공을 거둔 스타트업(신생 벤처기업)이 줄을 잇고 있다. 전문가들은 한국도 이런 과정을 거쳐 중고거래산업이 ‘불황 속 호황’을 이어갈 것이란 분석을 내놓고 있다.
국내 중고거래 시장은 1990년대 벼룩시장 같은 생활정보지, 2000년대 중고나라로 대표되는 인터넷 카페, 2010년대 들어선 스마트폰 앱으로 중심축이 이동해왔다. 앱 점유율을 보면 번개장터, 중고나라, 당근마켓, 헬로마켓 4대 스타트업을 중심으로 여러 후발주자가 뒤따르는 구도다. 이들 스타트업은 위치정보, 간편결제, 블록체인 등 신기술을 활용해 거래 투명성을 높이는 데 집중하고 있다.
“사기거래 꼼짝마” 신기술로 무장
번개장터 거래액은 지난해 1분기 178억원에서 올 3분기 623억원으로 급증했다. 거래대금을 업체 측이 맡아뒀다가 배송이 완료되면 정산해주는 간편결제 서비스 ‘번개페이’, 전화번호 노출 없이 대화할 수 있는 ‘번개톡’ 메신저 등 다중 안전장치를 강화하면서 좋은 반응을 얻었다는 설명이다.
당근마켓은 거주지 인근 주민 간 직거래에 집중하고 있다. 동네 인증, 매너 평가 등을 토대로 이웃끼리 만나 얼굴을 보며 거래하도록 연결해준다. 이용자당 월평균 방문 횟수 25회, 하루 체류시간 21분을 기록해 충성도 높은 이용자를 확보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또 다른 업체인 셀잇은 판매자 물품을 업체가 직매입한 뒤 판매하는 방식으로 사기 가능성을 원천 차단하고 있다.
중고나라는 분산합의와 이중암호화 기술을 활용한 블록체인 기반의 중고거래 서비스를 개발하고 있다. 법률 스타트업 리걸인사이트와 손잡고 건당 30만~100만원에 이르는 법률비용 부담 없이 고소장을 자동으로 작성해주는 서비스도 도입했다.
업계 관계자는 “거래 신뢰도를 높여야 ‘사기당할 위험이 높다’는 걱정 때문에 아예 중고거래에 관심을 두지 않던 이용자까지 끌어들일 수 있다”고 말했다.
당신의 재능도 사고팔 수 있다
한국리서치의 올 5월 소비자조사에 따르면 중고거래가 가장 활발한 품목은 의류(25.4%), 전자제품(22.5%), 서적(21.4%), 가방·구두(12.7%), 유아·아동용품(12.6%), 컴퓨터·주변기기(12.5%) 등의 순이었다.
1분에 4400개꼴로 새로운 중고상품이 올라오는 헬로마켓은 개인이 제작한 수제품이나 고민 상담, 음악 레슨, 집안 수리 등 ‘재능 거래’로 영역을 넓히고 있다. 이후국 헬로마켓 대표는 “수많은 중고거래 업체가 실패한 것은 전문업자들이 개입해 거래질서를 흐리는 일을 막지 못했기 때문”이라며 “순수한 개인 간 거래에 집중하면서 상품 범위를 넓혀갈 것”이라고 설명했다.
20~30대 젊은 층은 ‘소유’ 욕구가 기성세대보다 크지 않다는 점도 중고거래 시장의 전망을 밝게 하고 있다. 유승훈 중고나라 실장은 “1인 가구를 중심으로 마음에 드는 가구와 집기를 구입해 2년 정도 쓰다가 이사하면서 되파는 경향이 강해지고 있다”며 “본사에서 중고품을 방문 매입하고 현장에서 대금을 지급하는 등의 부가서비스가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고 전했다.
대기업 투자·후발주자 창업도 활발
넉넉한 자본력을 갖춘 대기업과 벤처캐피털도 중고거래 스타트업의 성장 가능성에 주목하고 있다. 올 들어 중고나라가 NHN페이코·JB우리캐피탈·키움증권에서 100억원을, 당근마켓은 소프트뱅크벤처스·카카오벤처스 등에서 57억원을 투자받았다. 헬로마켓도 설립 이후 200억원의 외부 투자를 유치한 것으로 알려졌다. 번개장터는 신한카드와 제휴해 카드 포인트로 중고품을 살 수 있는 서비스를 내놨다.
외식업소용 집기에 특화한 ‘황학동 온라인’, 중고 유아용품 전문 ‘로컬마켓’, 미개봉 새 상품만 취급하는 ‘미새하우스’ 등 틈새 중고거래 시장을 파고드는 후발업체의 창업도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임현우 기자 tardi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