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향기
서울관광재단과 함께하는 숨겨진 서울이야기 (3)
맛과 멋, 재미까지 갖춘 시장이야기
전통시장은 도시가 발전하고 대형마트가 들어서면서 위축됐지만 여전히 서민적인 멋과 맛이 있다. 시장은 최근 들어 깨끗하게 정비되고 편의시설도 잘 갖춰져 있지만 옛 정취와 낭만은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외국인 관광객은 물론 내국인도 즐겨 찾는 매력적인 여행지로 변모했다. 변화무쌍한 서울에서 오랜 전통을 이어오며 소박한 삶의 이야기를 쏟아내는 시장 속으로 여행을 떠나보자.
서민들의 터전 창신동 골목시장
낙산 자락에 자리한 창신동 주변에는 동대문 일대 상권이 발전하면서 시장이 들어섰다. 1970년대 말부터 청계천 주변 봉제공장이 평화시장과 가까운 창신동에 많이 옮겨왔다. 재봉틀 소리와 원단, 의류를 옮기는 오토바이 소리가 끊이지 않는 창신동 골목에는 3000개가 넘는 봉제공장이 모여있다. 창신동 647 일대는 동대문 의류시장의 생산기지이자 봉제 거리박물관이다.
봉제 골목은 창신시장 맛골목으로 이어진다. 창신시장에서는 봉제 일로 바쁜 사람들을 위해 바로 조리해서 먹을 수 있는 음식 재료나 반찬을 주로 판다. 창신시장의 명물은 매운 족발이다. 골목에는 숯불에 굽는 족발 냄새가 가득하다. 시장 골목 사이로 보이는 오래된 한옥과 목욕탕도 정취를 더한다.
창신시장 옆 골목, 창신동 197에 있는 ‘백남준기념관’은 세계적인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이 여섯 살 때부터 일본 도쿄로 떠나기 전까지 살았던 집이다. 조선의 마지막 외무장관이 살았다는 그의 집은 대문이 어찌나 큰지 ‘큰 대문집’으로 불렸다. 포목상의 아들로 태어나 창신동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백남준은 세계 곳곳에서 활동하며 유년 생활을 그리워했다. 그는 생전 마지막 인터뷰에서 ‘창신동에 가고 싶다’고 밝히기도 했다.
창신시장 앞 대로를 건너면 동대문 문구·완구 거리가 나온다. 부모님 손을 꼭 잡고 나들이 나온 아이들에게 보물섬 같은 곳이다. 어린이들은 100여 개 완구점이 늘어선 거리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완구 거리를 지나 동묘역 쪽으로 나오면 길가에 작은 국밥집이 있다. 원래 서민 화가 박수근의 창신동집 터였다. 박수근은 6·25 전쟁 때 미군들의 초상화를 그려 모은 돈으로 산 집에서 골목과 장터에 앉아있는 서민들을 그렸다. ‘우물가’ ‘빨래터’ ‘길가에서’ 등 그의 대표작이 이 터에서 탄생했다. 아이들과 앉아있는 노인, 행상 나온 여인의 소박하고 꾸밈없는 모습을 그대로 화폭에 담았다. 현재는 그의 집터에 음식점이 들어서 있고 흰 담벼락에 ‘박수근 화백 사시던 집 10년간’이라고 적혀 있을 뿐이다.
진귀한 풍경이 가득한 동묘 벼룩시장
장터 한가운데 《삼국지》의 영웅 관우를 모시는 동묘가 자리한 동묘 벼룩시장에서는 구제옷, 골동품, LP판, 카메라, 헌책 등 오래된 물건들을 판다. 독특하고 희귀한 아이템이 넘쳐나 주말이면 가족과 연인, 외국인 관광객이 몰려와 시장은 활기가 가득하다.
동묘 벼룩시장은 물건만 진귀한 게 아니다. 길거리에 산더미처럼 쌓아 놓은 구제 옷가지에서 보물찾기하듯 옷을 고르고 입어보는 사람들도 진풍경이다. 신발, 가방 같은 패션 소품까지, 잘 고르면 아주 저렴한 가격으로 패션 리더가 될 수 있다. 구제 옷가게는 지드래곤, 정형돈, 정려원 등 인기 스타가 즐겨 찾은 곳으로 알려지면서 빈티지의 명소가 됐다.
낡은 오디오, 시계, 도자기, 그릇, 헌책 등이 수북이 쌓여 있는 시장은 마치 골동품 박물관 같다. 좌판에 아무렇게나 널려 있는 물건을 이리저리 뒤적이다 보면 근사한 작품을 수집할 수도 있다. 화가 박수근의 그림 속 수수한 장터의 모습을 떠올리며 동묘 벼룩시장을 찾았지만 수많은 인파에 몰려다니다 보면 그런 풍경은 느낄 새가 없다. 그래도 여전히 어린 시절 추억이 스며 있는 동묘 벼룩시장에서는 30년 전통의 멸치국수를 맛볼 수 있고, 천 원짜리 한 장으로 따뜻한 아메리카노 커피도 마실 수 있다.
110년 전통의 광장시장
종로구 예지동에 있는 광장시장은 1905년 일제가 화폐정리사업을 단행하면서 조선 상인의 기반을 흔들자 조선 상인들이 뜻을 모아 세운 곳이다. 우리 자본으로 운영한 시장은 매일 장이 서는 최초의 상설시장이었다. 광장시장은 1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대규모 포목시장으로 성장하면서 관혼상제에 필요한 한복과 폐백, 침구, 수의를 파는 상점이 모여 있다. 시장 상가 2층에는 의류와 잡화, 액세서리까지 낡은 느낌의 빈티지한 물건이 가득한 수입구제상점도 들어서 있다. 6·25전쟁 때 시장 일부가 파괴됐다가 피란민들이 생필품과 군수품을 사고팔면서 수입 구제시장의 시초가 됐다.
한국 전통의 멋과 맛이 다 모여있는 광장시장에서 먹거리를 빼놓을 수 없다. 시장에는 늘 맛있는 냄새가 풍긴다. 40년이 넘은 육회 골목은 대기표를 받아들고 줄을 선 사람들로 붐빈다. 냄비가 넘치도록 재료가 담긴 시원한 대구 매운탕, 겨자 소스를 찍어 먹는 마약김밥, 채소가 푸짐하게 들어간 비빔밥, 비 오는 날이면 기름 냄새가 진동하는 도톰한 빈대떡을 맛보는 것은 광장시장을 찾는 또 다른 즐거움이다.
드라마 영화 촬영지 포방터시장
홍제천이 잔잔히 흐르는 홍은동 포방터는 조선시대 서울의 외곽을 방어하며 포 연습을 하던 곳이었다. 6·25전쟁 당시 북한군을 공격하기 위해 포를 설치한 포방터 부근에 1970년대 초 시장이 들어섰다. 규모가 작은 시장이지만 벽화가 그려진 소박한 마을 풍경 때문에 드라마와 영화촬영 장소로 유명하다. 드라마 ‘부탁해요 엄마’에 등장한 정육점과 반찬가게는 서민들의 삶의 모습이 담겨 있다.
홍제천을 가로지르는 포방교를 건너면 시장 입구에 포방터 시장의 역사를 알리는 조형물이 세워져 있다. 시장에 들어서면 상점마다 아기자기한 간판들이 걸려 있다. 간판 디자인을 통일한 시장 거리는 깔끔하고 단정하다. 포방터시장은 토요장이 크게 열린다. 시장 한복판에서 버스킹 공연, 경매 이벤트, 특가 상품전 등이 펼쳐진다. 평소 조용하던 시장에 활기가 넘친다. 얼마 전 TV 예능프로그램 ‘백종원의 골목식당’에 포방터 시장편이 방영돼 인기를 끌면서 작은 시장을 찾는 사람이 점점 늘고 있다.
젊은 예술가들의 동진시장
마포구 연남동에 있는 동진시장은 좁은 골목에 있다. 중국요리집이 즐비한 연남동에서 1960~1970년대 마을 사람들의 식탁을 책임지던 전통시장이었다. 대형마트가 하나둘 들어서면서 전통시장으로 향하던 발길이 줄어들자 상인들은 떠났다. 쇠락한 시장은 주변 상인들이 창고로 사용하다가 2014년 새롭게 태어났다.
평일에는 옛 정취가 남아 있는 전통시장과 다를 바 없지만 주말에는 열정을 가진 젊은이들이 운영하는 이색적인 플리마켓이 열린다. 금요일에는 야시장, 토요일에는 7일장, 일요일에는 일요시장이 문을 연다. 허름한 시장 안에서 홍대 일대에 있던 젊은 예술가들이 직접 디자인한 소품과 액세서리를 판매한다. 목공품을 만들어 파는 공방도 열리고 편집숍에서 독특한 물건을 구경할 수도 있다. 도시농부들이 재배한 농작물과 다양한 먹거리도 있다. 좁은 골목으로 연결된 시장 밖에는 독립출판 서적들로 가득한 책방, 개성 넘치는 카페와 식당들이 생기면서 동진시장은 젊은이들이 모여드는 새로운 문화공간으로 변하고 있다.
글·사진=이솔 여행작가 leesoltour@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