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광엽 논설위원
[ 백광엽 기자 ]
자본주의는 부지런함을 보상한다. 많이 일할수록 성공에 가까워진다. 반면 사회주의는 결과적으로 게으름을 보상한다. ‘능력대로 일하고 필요한 만큼 나눠 갖자’는 구호는 그럴듯하지만, 일할 동기를 차단한다는 치명적 약점을 갖는다. 자본주의의 승리는 ‘노동량’ 격차가 부른 자연스러운 결말이다.
사회주의 혁명가 레닌은 일과 노동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1918년 세계 최초로 제정한 공산헌법에 ‘일하지 않는 자, 먹을 수 없다’는 조항을 넣은 이유다. “자본주의에서 열심히 일하는 정신을 배우자”는 유언도 남겼다. 하지만 레닌 사후, 소련은 일하지 않는 자들의 나라로 치달았다. 74년간의 실험은 예고된 파산으로 끝났다.
'지대의 제도화'로 치닫는 한국
오늘 한국의 문제는 고용 참사나 투자 급감 등 지표 추락이 아니다. 일하지 않는, 덜 일하고 더 요구하는 사람이 넘치는 것이 위기의 본질이다. 일하지 않고 생존하는 유일한 방법은 일하는 사람에게 기생하는 것이다. ‘빨대’를 꽂아야 한다. 불로소득을 좇는 이런 행태를 경제학에서는 지대추구라 부른다. 독과점적 지위와 특권을 강화하며, 기여분보다 많은 몫을 챙기는 행위다.
레닌은 자본가를 ‘지대 향유자’로 규정했다. 하지만 오판이었음이 역사에서 판명 났다. 지금 우리 내부의 지대 추구자를 꼽자면 대기업·공기업의 ‘귀족 노조’가 1순위일 것이다. 조합원의 정규직 우선 채용, 고용 세습 등의 이권 추구를 불법적 수단까지 동원해 관철해 낸다. 주요국은 다 도입한 ‘탄력근로 기간 확대’를 막겠다며 총파업까지 예고한 건 지대보존에 대한 집착을 보여준다. 지역 노동자와 주민들이 환영하는 ‘반값’ 광주형 일자리를 집요하게 반대하는 것도 그런 맥락이다.
귀족 노조의 ‘억대 연봉’ 역시 지대의 산물이다. 임금이 개별 노동자의 생산성이 아니라 노조 교섭력의 함수로 변질되고 만 것이다. 이들의 부당이득은 전체 근로자의 90%인 ‘비(非)노조’ 노동자에 대한 일종의 착취다. 거대 노조의 입김 탓에 기형적으로 설계된 최저임금제와 주52시간 근로제는 약자들을 노동시장 바깥으로 내몰았다.
불로소득 집착하는 거대노조
‘지대 경제’는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확산일로다. 실력보다 연줄과 충성심에 기반한 ‘운동권 지대’의 형성이 주목받는다. 운동권 카르텔은 협동조합 등을 만들어 중앙·지방정부 지원을 독식하며 태양광 발전을 ‘좌파 비즈니스’로 접수했다. 서로 밀어주고 끌어주며 권력 상층부로 진입 중이다. 청와대·내각·정부 요직의 절반 가까이가 운동권·시민단체 출신으로 집계될 정도다.
노조·운동권·시민단체만이 아니다. 지대 세력의 출몰은 전방위적이다. 의원들은 규제 입법, 관료들은 법령 해석을 통해 특권을 지켜낸다. 공무원 급증도 ‘공무원 지대’ 비대화의 방증이다. 도덕이 지배해야 할 교육과 사법 분야마저 지대 메커니즘에 포섭되는 양상이다. 한 고교의 ‘시험지 유출’ 수사 결과는 쉬쉬해온 ‘학교 지대’의 일단을 드러냈다. 헌법이 요구하는 직업적 양심보다 법관 개인의 양심을 앞세운 수상한 판결이 잦은 것은 사업부 내 ‘지대 판사’들의 약진을 짐작하게 한다.
지대추구자들의 최종 목표는 ‘일 안 하면서 먹고살기’의 제도화다. 다른 나라에선 찾아보기 힘든 ‘협력이익 공유제’ 입법이 법의 타락으로 보이는 배경이다. 지대의 구조화는 한 나라를 순식간에 나락으로 빠뜨린다는 사실이 남미 남유럽 등에서 숱하게 입증됐다. 우리 기업인들에게 ‘공짜’를 요구하는듯한 북한도 걱정스럽다.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나라를 만들겠다”던 문재인 대통령의 취임사가 ‘일하지 않는 자들의 나라’를 말하는 것이라면 곤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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