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 진통' 끝에 시행한 대동법·균역법…노비 해방·소농 자립 견인

입력 2018-11-09 17:20
수정 2018-11-10 09:25
이영훈의 한국경제史 3000년
(26) 국가적 재분배경제

백성이 내는 각종 공물
토지세로 바꾼 것이 대동법

백성의 권리 보호 애쓴 영조
왕실과 정부의 고리대 폐지…민간 이자율 年 20%로 제한

춘궁기에 쌀·잡곡 나눠주고
가을 추수 후 걷는 환곡제는 국가 주도 '재분배 경제'



여러 형태의 교역

인류 문명은 교역(trade)과 함께 출발했다. ‘태초에 농업이 아니라 상업이 있었다’는 독일 속담은 진리다. 가계, 촌락, 지역 간 유무상통을 위한 교역은 경제의 재생산에 불가결한 조건이다. 상이한 시간 간 교역도 필수적이다. 풍년이 들면 수확의 일부를 저장해 흉년에 대비해야 한다.

교역에는 크게 세 가지 형태가 있었다. 호혜(reciprocity), 재분배(redistribution), 시장(market)이 그것이다. 호혜는 개인, 촌락, 종족 간에 선물을 주고받음을 말한다. 재분배는 중앙권력이 사회의 잉여를 걷어 다른 성원에게 나누거나 다른 지역으로 옮기거나 창고에 저장함을 말한다. 시장은 다수의 인간이 일정한 장소에 모여 각자의 필요와 이익을 위해 무작위로 거래함을 말한다. 호혜와 재분배가 얼굴을 아는 사람끼리의 대면거래라면 시장은 알지 못하는 사람 간 익명거래다.

17세기 전반까지 조선에서는 재분배와 선물 경제가 지배적이었다. 왕조는 백성으로부터 조세와 공물을 걷어 왕실과 양반에게 나눠 줬다. 왕실과 양반은 노비로부터도 공물을 걷었다. 연후에 왕실과 양반 간 선물 교환이 풍성하게 이뤄졌다. 이전에 소개한 대로 승지 출신인 이문건(1494∼1567)은 226개월 동안 6346회의 선물을 수취했다. 왕조의 백성을 위한 재분배는 빈약했다. 초기에는 의창(義倉)의 저장곡이 꽤 풍족해 백성의 살림살이에 도움이 됐는데, 16세기 이후 거의 없어지고 말았다. 그 대신 왕실과 양반의 고리대가 발달했는데 백성을 고달프게 할 뿐이었다.

시장 통합

1660년대 이후 중계무역의 발달, 장시의 확산, 동전의 유통으로 어느덧 시장이 전체 경제의 불가결한 범주로 자리 잡았다. 상하 계층을 막론하고 사람들의 경제생활은 시장과의 연관에 긴밀히 규정됐다. 물가 변동은 가정경제의 안정과 축적을 위해 소홀히 다룰 수 없는 정보로 부상했다. 알려진 한에서 물가를 일기에 규칙적으로 적기 시작한 최초의 사람은 경상도 고성의 구상덕(1706∼1761)이란 양반이다. 그는 주변의 장시에서 수집한 주요 재화의 물가를 한 달에 두어 차례 일기에 적었다. 1725년부터 시작한 그의 일기는 36년이나 이어졌다. 이외에 친족 집단의 계(契)문서와 서원(書院)의 지출부에서도 물가 정보가 풍성하게 전한다.

18세기 중엽, 해마다 쌀값의 변동은 동시대 중국과 일본에 비해 심한 편이었다. 수리시설을 포함한 농업생산력의 수준이 낮아 자연재해의 충격에 상대적으로 취약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지방 간 쌀시장의 통합은 꽤 높은 수준이었다. 상인들은 풍년이 든 지방의 쌀을 흉년이 든 지방으로 옮겨 쌀값의 지역 간 차이에 따른 이윤을 챙겼다. 일반적으로 전라도의 쌀값이 경상도보다 쌌다. 전라도 남해의 상인은 경상도 남해와 동해까지 진출해 쌀을 팔고 어물을 사서 돌아갔다. 이 같은 지방 간 쌀시장의 통합은 바다와 강으로 연결된 지역에 한했다. 배가 들어갈 수 없는 내륙은 도로와 운송수단이 열악해 연해 지역과 격리된 별도의 시장권을 이뤘다. 시장을 통한 경제의 광역적 통합에는 아직 커다란 한계가 있었다.


대동법과 균역법

유교의 정치철학은 백성의 살림살이를 고르게 하고 평안하게 함을 최고의 이념으로 삼았다. 17∼18세기에 걸쳐 조선왕조는 이 같은 이념에 충실한 공공국가로 전진했다. 1608년 경기도를 시작으로 대동법(大同法)이 실시됐다. 백성의 가장 큰 부담인 각종 공물을 토지세로 전환해 쌀로 일괄 수취한 것이 대동법이다. 대동법은 1708년 황해도의 실시로 겨우 마무리됐다. 대동법 시행이 무려 100년이나 걸린 것은 토지를 많이 소유한 양반세력의 저항이 컸기 때문이다. 그만큼 이전의 공납제는 토지가 적은 하층 농민에게 불리한 제도였다.

여러 임금 가운데 영조는 백성의 권리를 보호하고 신장하는 데 애를 많이 쓴 소민(小民)의 군왕이었다. 그는 노와 양녀가 낳은 자식을 양인으로 돌리는 종량법을 확정했다. 주인이 노비를 함부로 죽이거나 혹형을 가하는 일도 처벌하거나 금지했다. 왕실과 정부 기관의 고리대를 폐지했으며, 민간 고리대에도 제한을 가해 연간 이자율이 20%를 넘지 못하게 했다. 드디어 1750년에는 양인 농민을 괴롭힌 연간 2필의 군포(軍布)를 1필로 낮추고 그 대신 토지세를 추가 징수하는 균역법(均役法)을 단행했다. 그 역시 양반세력의 저항으로 1세기나 끌어온 논쟁이었다. 대동법과 균역법 시행은 노비 해방과 소농 자립의 추세를 견인했다.

환곡제

환곡제(還穀制)는 봄에 종자와 농량(農糧: 농사짓는 동안 먹을 양식)의 용도로 쌀과 잡곡을 농가에 나눠주고 추수 후 10%의 이자를 붙여 회수하는 곡물의 저장과 대부 제도다. 17∼18세기 조선왕조의 국가적 재분배경제는 환곡제를 중핵으로 했다. 17세기 후반의 경제적 확장과 대동법 시행에 따른 재정 잉여의 누적으로 환곡의 양이 부쩍 증가했다. 18세기 초반 환곡은 쌀과 잡곡을 합해 500만 석이나 됐으며, 18세기 말까지는 1000만 석의 거대 규모에 달했다. 그 가운데 약 700만 석이 매년 농가에 대부됐다. 당시 전국의 호총은 170만이었다. 이에 환곡의 호당 대부는 평균 4석으로 적지 않은 양이었다. 환곡제는 농가의 안정적 재생산에 크게 기여했다.

동시대 중국에서는 상평곡(常平穀)이라는 곡물의 저장제도가 있었는데, 풍흉에 따른 물가 변동을 조절하는 역할을 맡았다. 그에 비해 조선의 환곡은 물가의 수준과 무관하게 매년 일정량의 곡물을 모든 농가에 대부했다. 중국의 상평곡 역시 18세기 말에 최대 규모였는데, 쌀로 환산해 총 2250만 석이었다. 그 총량은 조선의 3.3배이지만, 인구가 조선의 20배나 돼 호당 저장량은 조선이 6배나 많았다.

18세기 군현의 수령이 맡은 가장 중요한 업무는 환곡을 나누고 거두는 일이었다. 전국 3951개 면마다 평균 2400여 석의 곡물을 저장한 창고가 설치됐다. 제시된 지도는 전라도 남원의 하번암면으로 장시 곁에 사창(社倉)이 건립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장시가 대표하는 시장과 사창이 대표하는 재분배는 18세기 소농경제를 지탱하는 양대 축이었다. 18세기 후반 유라시아 대륙의 서쪽 끝 영국에서는 산업혁명의 횃불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 시기에 유라시아 대륙의 동쪽 끝 조선에서는 전 세계 어디에도 유례가 없는 거대 규모의 국가적 재분배경제가 영위됐다.


한성의 경제

18세기 말 쌀의 총생산량은 대략 1800만 석에 달했다(1석=100L). 쌀의 상품화율은 20% 전후이며, 이에 쌀의 시장 교역은 총 360만 석 정도였다. 그에 비해 환곡제를 통한 쌀의 유통은 원리곡(元利穀)을 합해 510만 석이나 됐다. 거기에다 왕조가 쌀로 수취하는 조세가 약 120만 석이었다. 이에 환곡과 조세로 이뤄진 쌀의 국가적 유통은 도합 630만 석으로 시장을 통한 360만 석을 훨씬 능가했다. 재분배경제의 영역은 농촌경제만이 아니었다. 왕도 한성부(漢城府)의 경제생활도 면밀하게 기획된 재분배경제로 영위됐다.

한성의 중앙정부, 왕실, 군영이 전국에서 현물로 걷어 올리는 재정수입은 쌀 60만 석, 콩 8만 석, 포목 50만 필, 동전 130만 냥이었다. 18세기 말 한성의 인구는 4만5000호 20만 명에 달했다. 한성은 전국에서 유일하게 큰 도시였다. 호의 절반은 정부, 왕실, 군영에 종사하는 관료, 이서(吏胥), 군인, 도예(徒), 궁속(宮屬)이었다. 나머지 절반은 상인, 수공업자, 농민, 일꾼으로서 정부, 왕실, 군영에 물자와 인력을 조달했다. 한성 주민의 생활소득은 상당 부분 정부, 왕실, 군영의 재정 지출을 원천으로 했다. 20만 인구가 소비하는 쌀의 절반 이상과 의료의 대부분이 재정 경로로 확보됐다. 한성에는 환곡제가 없었는데, 재정이 그 역할을 대신했기 때문이다.

성 안팎에서 시장이 활발하게 열렸다고 해서 한성을 상인 도시라고 착각해서는 곤란하다. 한성의 상인은 왕조의 역인(役人)이었다. 한성의 시장, 곧 시전(市廛)은 재정적 물류에 기초한, 상하 역무(役務) 관계로 짜인 공간이었다. 한성은 왕조 국가의 행정 도시였다.

이영훈 < 前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