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희경 기자의 컬처 insight
대공황 때 태어나 미국인 위로
시대 관통하는 긍정의 아이콘
27일부터 내달까지 한국 나들이
유연성과 소통 능력 배울 기회
[ 김희경 기자 ]
1928년 미국 사람들은 ‘증기선 윌리’란 애니메이션에 등장한 한 캐릭터에 열광했다. 방영 1년 만에 이 캐릭터가 받은 팬레터만 80만 통에 달했다. 여느 할리우드 배우가 받은 팬레터보다 많았다. 사람이 아닌 애니메이션 캐릭터에 강력한 팬덤이 생긴 첫 사례다.
올해로 태어난 지 90년 된 ‘미키 마우스’ 얘기다. 생쥐 모양을 하고 있을 뿐인 이 캐릭터에 사람들은 왜 빠져들었을까.
당시 미국엔 대공황의 암운이 드리우기 시작했다. 사회 분위기도 가라앉고 있었다. 이듬해 대공황이 닥치자 미키 마우스는 미국인들에게 위로를 전하는 아이템이 됐다. 약하디 약한 개인처럼 미키 마우스도 작고 연약한 존재로 등장했다. 그러나 어려움을 피하지 않고 유머와 용기로 헤쳐나갔다. 이전 애니메이션들과 달리 누군가를 해하거나 악행을 저지르지도 않았다. 미니 마우스, 구피 등 친구들과의 관계 속에서 즐겁게 놀고 웃을 뿐이었다. 미키 마우스가 준 위로는 거대한 산업의 단초가 됐다. 월트디즈니사의 창업주 고(故) 월트 디즈니는 이렇게 표현했다. “모든 것은 생쥐 한 마리로부터 시작됐다.” 이 캐릭터는 디즈니사뿐 아니라 전 세계 캐릭터산업이 발전할 수 있는 계기가 됐다.
국내 캐릭터산업이 ‘제2의 전성기’를 맞았다고 한다. 1983년 ‘둘리’로부터 싹튼 씨앗이 ‘뿌까’ ‘뽀로로’ ‘핑크퐁’에 이르며 꽃을 피우고 있다는 평가다. 그러나 무조건 미래를 낙관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반짝인기에 그치지 않고 미키 마우스처럼 세대를 뛰어넘어 롱런할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국내에서 미키 마우스가 연구 대상이 되고 있는 이유다. 이들은 디즈니의 캐릭터와 콘텐츠가 장기간 생존·발전한 비결을 파악해 적용하려 한다. 전문가들이 발견한 ‘늙지 않는 미키 마우스’의 비결은 시대를 관통한 긍정의 메시지, 변화를 거부하지 않는 유연함, 캐릭터의 가치를 높이는 관리 시스템에서 찾을 수 있다.
미키 마우스는 90년간 총 121편의 영상물, 3만여 권의 도서에 등장했다. 그런데 성격과 형태는 조금씩 달랐다. 대중과 적극적으로 소통하고 그 정서를 반영했다. 미키 마우스의 성격이 맨 처음 등장했을 때부터 온화했던 건 아니었다. 좀 급하고 약간의 폭력성도 띠고 있었다. 애니메이션을 본 일부 부모들이 항의하자 곧 수정했다.
영리한 분산 전략도 더해졌다. 캐릭터의 초기 매력을 그리워하는 목소리가 나오자 1934년엔 친구 ‘도널드 덕’을 만들었다. 도널드 덕에게 악동의 이미지를 부여, 장난기 섞인 웃음과 작은 긴장감을 선사했다. 이 덕분에 미키 마우스는 착하고 긍정적인 성격을 그대로 유지해 나갈 수 있었다.
형태도 정교하게 변했다. 까만 동그라미로만 그려졌던 미키 마우스의 눈엔 1939년 하얀 동그라미 바탕이 더해졌다. 실제 눈동자와 비슷하게 표현한 것으로 더 또렷하면서도 살아 있는 표정을 담아냈다. TV 광고가 본격화된 1950년대엔 눈썹을 붙여 표정 변화를 더욱 정밀하게 보여줬고 이후에도 변화는 계속됐다.
디즈니만의 철저한 관리 시스템도 눈길을 끈다. 디즈니엔 미키 마우스만 전담하는 직원들이 있다. 또 디즈니의 모든 직원 명함엔 디즈니 로고 대신 미키 마우스를 새겨넣었다. 스스로 캐릭터의 가치를 높이고 존중하는 것이다. 희소성 전략도 펼치고 있다. 디즈니랜드를 제외하곤 팬들과 직접 만나는 미키 마우스 캐릭터는 세계에서 딱 한 곳에만 있도록 한다. 미키 마우스가 오는 27일 한국에 온다. 다음달까지 한국에 머무르며 국내 팬들과 만난다. 그러면 이 기간에 다른 나라에선 미키 마우스가 돌아다니지 않는다.
캐릭터는 늙지 않는다. 그러나 캐릭터를 바라보던 아이들은 나이를 먹는다. 다음 세대는 또 다른 눈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동일한 캐릭터를 좋아할 확률이 높지 않다. 이 간극을 좁히는 길은 캐릭터산업 종사자들의 영원한 과제다. 국내 캐릭터 업계가 ‘10조원 규모’라는 큰 숫자에 축배를 드는 것처럼 보여도 이 어려운 숙제 앞에서 고민은 더욱 깊어지고 있다. 90년, 100년을 이어갈 캐릭터의 탄생 여부는 결국 이런 촘촘한 전략들에 달려 있다.
hkki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