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년의 멋을 풍기며 웰에이징(well-aging)의 전형을 보여주는 배우 알 파치노에게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안긴 영화 ‘여인의 향기(Scent of a woman)’. 이 영화의 명장면은 주인공 프랭크(알 파치노)가 도나(가브리엘 앤워)와 함께 ‘Por Una Cabeza’에 맞춰 탱고를 추는 장면일 것이다. 눈이 보이지 않는 프랭크와 탱고를 못 추는 도나가 환상적인 호흡으로 탱고를 추는 이 장면에서 프랭크는 도나에게 이렇게 말한다. ‘실수를 하면 스텝이 엉키고 그게 바로 탱고죠.’
프랭크는 불의의 사고로 시력을 잃고 전역한 퇴역 장교로, 달라진 자신의 처지와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고 세상과 담을 쌓고 살아간다. 살아 있어야 할 아무런 의미를 찾지 못한 채 뉴욕으로 자살 여행을 떠나는 그는 흔히 말하는 우울증을 가지고 있는 환자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우울증이라고 하면 슬픈 감정, 우울한 표정, 눈물 등의 증상만을 떠올리지만 프랭크와 같이 죽음이라는 극단적인 선택까지 하게 할 만큼 무서운 질환 중 하나다.
우울증의 증상은 기분, 신체, 인지 등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기분 증상의 첫 번째는 우울하고 슬픈 기분이다. 많은 사람들은 이럴 때 기분이 가라앉는다고 표현한다. 불안하고 초조하고 이유 없이 안절부절 못하게 되며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나면서 눈물을 멈추기 어렵다. 두 번째는 아무것도 하기 싫어지고 만사가 귀찮아진다. 하고 싶은 것도 없고, 재미있는 것도 없고, 아무 의욕이 없어진다. 이러한 증상을 무의욕증이라고 하며 우울증의 기분 증상 중 가장 중요한 증상이기도 하다.
신체 증상의 첫 번째는 수면의 변화다. 자려고 누우면 온갖 생각이 떠올라서 잠을 이룰 수 없고, 잠이 들어도 자꾸 깨는 불면증이 대부분이다. 수면의 질이 나빠져 꿈을 많이 꾸게 되고, 악몽도 많이 꾼다. 간혹 불면증이 아니라 과다수면 증상을 보이는 사람도 있다. 두 번째는 식욕의 변화다. 남성의 경우 거의 다, 여성의 경우에는 절반 정도 식욕이 떨어지는 증상이 나타난다. 먹고 싶은 것도 없고, 먹어도 무슨 맛인지 잘 모르게 되며 이로 인해 체중이 감소한다. 반대로 남성의 일부, 여성의 나머지 절반 정도가 식욕이 증가해 폭식을 하게 된다. 엄청난 폭식으로 배가 부른데도 마음이 허한 것을 달래기 위해 지속적으로 폭식을 하게 돼 체중이 증가한다. 신체 증상의 세 번째 변화는 사고와 신체의 움직임이 지나치게 빨라지거나 느려지는 정신운동 초조나 정신운동 지연이다. 네 번째는 조금만 움직여도 금방 피곤해지고 기운이 없어지는 증상이다.
진단 기준에는 포함되지 않지만 우리나라, 특히 중년여성에게 가장 흔한 우울증의 증상은 이유 없이 몸이 아픈 것이다. 가장 흔한 증상으로는 두통, 어지러움, 체함, 오심, 구토, 배탈, 설사, 목 허리 같은 관절 부위의 통증이다. 한꺼번에 아픈 것이 아니라 돌아다니면서 아프게 되고, 심한 통증으로 병원에 가서 검사를 해도 정상으로 나와 신경성 혹은 스트레스성이라는 이야기만 듣게 된다.
가장 중요한 인지증상은 머릿속 생각으로 나타나는 증상으로, 외부에서 오는 모든 정보가 다 부정적으로 왜곡되어 해석되며 그 부정적인 생각들이 하루 종일 머릿속에서 떠돌게 된다. 주변 사람들의 말과 표정, 행동, 주변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과 상황들이 부정적으로 왜곡되다 보니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없고, 자신과 주변을 더욱더 부정적으로 인지하게 된다. 우울증 환자들이 가장 힘들어하는 증상이 바로 이것이다. 자존감이 많이 낮아지며 예전에 비해 자신이 쓸모없고 가치 없는 사람처럼 느껴지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주변 사람들, 특히 가족에게 지나치거나 부적절한 죄책감이 생긴다. 자신 때문에 배우자가, 자식이, 부모가 힘들어 한다는 생각에 괴로워하게 되고 심해지면 자신만 사라지면 될 것 같다는 생각에까지 이르게 되는 것이다.
또 다른 증상으로는 집중력과 단기기억력이 손상되어 건망증이 심해지는 것을 들 수 있다. 이로 인해 학습 기능이나 직업적 기능이 크게 손상되어 나이가 많은 사람은 우울증과 치매를 헷갈려하는 경우도 있다. 이렇게 힘들다 보니 사후세계나 죽음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되고 자살충동을 느끼게 된다. 이런 증상들 중 5가지 이상이 2주 이상 지속될 때 우울증이라고 진단을 내리게 된다.
영화 ‘여인의 향기’에서 프랭크는 뉴욕으로 같이 여행을 떠나게 된 고등학생 찰리를 통해 삶의 의미를 다시 되새기게 되고, 서로를 의지하며 우울증이 호전되는 것으로 훈훈하게 마무리 된다. 하지만 현실에서 우울증은 치료를 받아야 하는 질병이다. 과도하거나 지속적인 스트레스로 인해 뇌 속 신경전달물질의 균형이 깨진 것이므로 약물치료를 통해 깨진 균형을 맞춰줘야 하기 때문이다. 치료를 받지 않고 저절로 좋아진 우울증은 원래의 기분 상태로 돌아가지 못해서 우울한 것이 성격처럼 굳어질 수도 있고, 작은 스트레스에도 재발할 위험이 크다.
많은 영화나 드라마에서 우울증을 앓는 주인공이 사랑 혹은 우정을 통해 우울증을 극복하는 스토리를 보여주곤 한다. 가족, 연인, 친구 등 주변 사람들의 응원과 지지는 우울증 치료에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약을 복용하는 것이 치료의 기본이다. 주변 사람들은 환자가 약을 잘 먹고 치료를 잘 받을 수 있도록 도와주거나 동기를 주는 것이다.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As good as it gets)’라는 영화에서 강박증을 앓는 멜빈(잭 니콜슨)이 단골 레스토랑의 직원(캐롤)과 사랑에 빠지게 되고, 그녀와의 사랑을 위해 정신건강의학과 의사를 찾아가 그렇게 싫어하던, 심지어 증오하던 약을 처방받고 복용한다.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당신은 나를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게 해(You make me wanna be a better man).’
태유나 한경텐아시아 기자 youyou@ten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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