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현실 칼럼] 남의 평가에 죽고 사는 사람들

입력 2018-11-01 17:52
"WEF 평가에 고무된 정부 여당
본질 놔두고 '순위의 노예' 된 듯
스스로 '생각할 힘'은 없는 건가"

안현실 논설·전문위원, 경영과학박사


[ 안현실 기자 ] 국가별 국제과학기술논문인용색인(SCI)급 논문 수가 그 나라 과학경쟁력 평가의 전부일 수 없다는 건 과학자들도 인정한다. ‘SCI 논문 숭배주의’가 낳고 있는 부작용으로 따지면 우리나라도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다. 미국·유럽의 대형 학술출판사들이 논문 게재를 독점하면서 야기되는 공정성 논란까지 끌고 들어오면 문제는 더욱 복잡해진다.

기술경쟁력 평가로 활용되는 특허 수도 마찬가지다. 특허 형태로 공개하면 보호를 받지만 기술이 알려지는 것 자체를 꺼리는 경우도 많다. 기업에 따라서는 기술의 20~30%를 출원한다고 하니, 그 내부에 축적돼 있는 다양한 기술자산에 대해 밖에선 정확히 알기 어렵다. 기업을 넘어 국가 단위 기술경쟁력 평가로 가면 더욱 그럴 것이다.

이러니 국가 전체 경쟁력을 평가하는 건 얼마나 복잡하고 어려운 작업일지 긴 설명이 필요 없다. 어떤 경제학자는 “국가경쟁력 개념 자체가 허구”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경제포럼(WEF) 같은 곳은 국가경쟁력 평가 장사에 집착한다. 무슨 평가방법을 동원하든 순위만 매기면 먹히는 곳이 있으니 그럴 것이다. 특히 우리나라는 ‘WEF 평가 반응도’에서 유별나다고 할 정도 아닌가.

올해도 어김이 없다. 지난해 26위였던 우리나라 국가경쟁력이 WEF의 평가방식 개편에 힘입어 15위로 나오자 정부 여당은 내심 고무된 모습이다. 더불어민주당은 “(WEF 평가보고서가) 소득주도성장과 포용성장이라는 정부 여당의 경제기조가 옳은 방향임을 보여준 것”이라고 해석했다. “특히 국가부채와 인플레이션율 등 거시경제 안정성은 세계 1위, 연구개발(R&D)·특허 등 혁신역량도 세계 최상위권으로 나타났다”고 강조했다.

이쯤 되면 ‘WEF 신봉자’가 따로 없다. 어떤 방송은 “WEF가 거시경제 안정성에서 한국을 1위로 평가했는데 경제위기를 떠들던 경제지들은 다 어디 갔느냐”고 비판했다. 이들 눈엔 남의 평가만 보일 뿐, 엄혹한 경제 현실은 안중에도 없는 모양이다.

남이 아무리 높게 평가해도 스스로 생각할 힘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확대 해석’을 하지 말아야 할 게 무엇인지 정도는 분간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는 ‘소규모 개방경제 국가’다. WEF가 몇 개의 지표만으로 한국을 거시경제 안정성에서 1위로 평가했지만, 외부 충격이 왔을 때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제일 완충장치가 잘 돼 있다고 생각할 국민이 얼마나 있을까 싶다. 세계 최상위권이라는 혁신역량도 실제 혁신으로 이어지지 않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나? 정부 여당은 딴 세상에서 살다 온 사람들 같다.

‘안에서 봐도 문제, 밖에서 봐도 문제’로 지적된 부분에 대해서만이라도 뼈아픈 반성을 한다면 그나마 남의 평가가 ‘약’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가령 ‘노사관계 협력’ 같은 경우다. 유감스럽게도 이런 사안에 대한 정부 여당의 치열한 문제의식은 찾아보기 어렵다.

WEF 평가가 나오자 기획재정부는 민·관 합동 국가경쟁력정책협의회를 곧 열겠다고 한다. 우리 정부는 스스로 평가하고 바로잡을 힘이 없다는 건지 알 수가 없다. 부처나 공공기관들은 툭하면 비싼 돈 주고 외국계 컨설팅사에 과제를 발주한다. 김동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지난 4월 클라우스 슈바프 WEF 회장과의 면담 후 “(우리가) WEF 4차 산업혁명센터 자매연구소를 만들 테니 협력하자고 제안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역사적으로 스스로 생각할 힘을 키우지 않고 앞서 나간 국가를 본 적이 없다.

남의 생각, 남의 평가에 죽고 사는 건 지식의 전당이라는 이 땅의 대학들도 다를 게 없다. 유명 대학 총장들이 대학의 ‘경쟁력’이 아니라 ‘경쟁력 평가 순위’를 높이기 위해 해외기관 문 앞을 서성거린다는 판국이다. 이러다 밖에서 우리를 ‘평가의 노예’쯤으로 여기지 않을지 모르겠다.

ah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