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영식 논설위원
[ 홍영식 기자 ]
북한의 대남 담당자들 대부분은 수십 년간 한 우물을 파온 사람들이다. 심리전까지 체계적으로 배우며 남측을 다루는 방법을 익힌 ‘협상 달인’들이다. 그들은 발언 하나하나 세밀하게 각본을 짜고 나온다. 북한 최고 지도자의 의중을 철저히 반영하는 것은 물론이다.
남북한 고위급 회담 북측 수석대표를 맡고 있는 이선권 북한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위원장의 무례하고 고압적인 태도가 가관이다. 그가 지난 9월 남북한 정상회담 특별수행원으로 평양을 찾은 우리 기업 총수들에게 “냉면이 목구멍으로 넘어갑니까”라고 면박을 준 사실이 국회 국정감사장에서 공개됐다. 남북한 경협이 부진한 데 대한 불만을 표출한 것이라고 하는데, 마치 상전이 아랫사람 대하는 듯한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핀잔 듣고도 굽실거린 장관
오랫동안 대남 협상가로 훈련받아온 이선권이 돌발적으로 이런 행태를 벌였을 리 만무하다. 북한 최고 지도부의 철저한 계산이 담겨 있을 것이다. 조명균 통일부 장관은 “비슷한 얘기를 들었다”며 발언 내용을 알고 있음을 인정했다. 그렇다면 우리 정부는 강력하게 대응했어야 마땅하다. 이런 몰상식한 행태에 말 한마디 안 한 우리 정부 태도에 기가 찰 뿐이다.
그러니 북한이 우리를 얼마나 만만하게 보겠나. 이선권이 그간 조 장관에게 보인 행태를 보면 어이가 없다. 남북한 고위급 회담 대표단 협의에 조 장관이 2~3분 늦자 “단장부터 앞장서야지 말이야…. 일이 잘될 수가 없어”라고 대놓고 타박했다. 조 장관이 “시계가 고장 난 때문”이라고 해명하자 “시계도 주인을 닮아서 그렇게(늦네)”라며 재차 핀잔을 줬다. 아무런 사전 통보도 없이 회담 취소를 밥 먹듯 해온 북한이 그런 말을 할 자격은 없다.
북한 특유의 진실 호도로 남측을 윽박지르기도 했다. 이선권은 “개성공단 가동·금강산 관광 중단은 남쪽 반(反)통일세력 때문”이라고 했다. 개성공단 가동 중단은 북한의 잇단 핵실험·미사일 도발이 원인이 됐고, 금강산 관광은 남측 관광객 피격 때문에 중단됐는데도 남측에 책임을 전가한 것이다.
남북한 대화, 원칙·금도 지켜야
더욱 기가 막힌 것은 조 장관이 조롱에 가까운 핀잔과 충고를 듣고도 할 말을 하기는커녕 굽실거리는 모습을 보였다는 점이다. “제가 수줍음이 많고 말주변이 (이 수석대표보다) 못하다” “말씀 주신 대로 역지사지하면서…”. “통일부 장관이 조평통 사무관이냐”는 비판이 괜히 나오는 게 아니다. 우리 정부는 북한이 풍계리 핵실험장 폐기를 취재할 국제기자단에 한국만 제외시켜도, 한·미 연합공군훈련을 구실로 남북한 고위급 회담을 일방적으로 취소해도 항의 한 번 하지 않았다.
여당 대표는 평양에 가서 북한에 다짐하듯 “우리가 정권을 뺏기면 남북한 교류가 안 되니 내가 살아 있는 한 절대 안 뺏기게 단단히 마음먹고 있다”고 했다. 남북한 산림협력 등 각종 회담에서 지원을 받는 북한이 큰소리치고, 우리는 말 없이 듣기만 하는 비상식적인 협상 구도가 고착화되는 듯하다. 여권은 개성공단 가동과 금강산 관광 중단 책임을 이명박·박근혜 정부에 돌리며, 원인을 제공한 북한의 ‘적반하장’에 대해선 입도 뻥긋하지 않고 있다.
남북한 대화가 아무리 중요해도 원칙과 금도를 지켜야 한다. 북한의 무례와 오만에 눈을 감고, “괜히 분위기 깨지 말고 알아서 기자”는 식의 태도는 북한의 ‘버르장머리’만 나쁘게 할 뿐이다. 더 이상 외국 언론들로부터 문재인 정부가 북한 대변인이라는 손가락질을 받는 일이 있어선 안 된다. 그래야 협상력도 커지고 남북한 간 진정한 대화가 가능해질 것이다.
ysho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