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희권의 호모글로벌리스 (8)] 아부의 처세술

입력 2018-10-29 19:15
박희권 < 글로벌리스트·한국외국어대 석좌교수 >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이 캠프 데이비드 별장으로 돌아와 말했다. “오늘 126을 쳤소.” 헨리 키신저 보좌관이 알랑거렸다. “각하, 골프 실력이 날로 향상되고 있습니다.” 닉슨이 대꾸했다. “골프가 아니라 볼링을 했소.”

아부는 인간관계의 윤활유다. 관계를 부드럽게 하고 마찰을 해소한다. 이런 점에서는 고래도 춤추게 하고 돌부처도 움직이게 하는 칭찬과 비슷하다. 그러나 의도가 있고 대가를 바라는 점에서 칭찬과 다르다.

사람 간 접촉을 업으로 하는 정치인과 외교관 중에는 아부에 능한 사람이 많다. “존경하는 국민” “위대한 국민”을 외치지 않는 정치인은 없다. 투표권을 갖고 있는 국민을 이길 정치인은 없기 때문이다. 상대편을 칭찬하지 않는 외교관도 드물다.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의 말처럼 한 방울의 꿀이 한 통의 쓸개즙보다 더 많은 파리를 잡는 법이다.

상대편을 기분 좋게 하는 전략적 아부를 통해 관계를 부드럽게 하고 양보를 얻어낸다.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은 마거릿 대처 영국 총리를 “금세기 거인 중의 하나”라고 치켜세웠다. 조지 부시 대통령은 빌 클린턴 대통령을 “만일 클린턴이 타이타닉 호였다면 (타이타닉 대신) 빙산이 침몰했을 것”이라고 칭찬했다. 클린턴 대통령은 장쩌민 중국 국가주석을 “선지자이자 탁월한 지성의 소유자”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시진핑 주석을 “최근 1세기 동안 중국의 가장 강력한 지도자”라고 치살렸다.

인류 역사만큼 유구한 생존기술

아부는 생존기술이기도 하다. 지위가 낮은 사람은 높은 사람에게 아부함으로써 출세를 도모한다. 절체절명의 위기 때 적절한 아부를 구사해 살아남기도 한다.

프랑스의 대표적 계몽사상가인 볼테르는 런던에서 3년간이나 망명생활을 했다. 당시 프랑스에 대한 영국인들의 감정은 좋지 않았다. 어느 날 영국 폭도들이 그를 죽이려고 하자 그가 말했다. “영국인들이여, 당신들은 내가 프랑스인이라는 이유로 나를 죽이려 하고 있소. 그런데 내가 영국인으로 태어나지 못한 것으로 이미 충분히 벌을 받은 것 아니오?” 적시의 아첨 덕택에 그는 가까스로 죽음을 모면했다.

아부의 역사는 인류 역사만큼 유구하다. 인간에겐 아부의 DNA가 있고 아부 기술은 날로 진화한다.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이 베이컨 대법관 집을 방문했다. 귀족들의 호화주택에 익숙하던 여왕은 대법관이 초라한 집에 살고 있는 것에 놀랐다. 이때 베이컨이 말했다. “집은 충분하지요. 다만 폐하께서 저를 이 집에 살기에는 너무 큰 인물로 만드셨지요.” 베이컨은 서양철학사를 통틀어 옥새상서와 대법관이라는 최고위 관직에 올랐다.

미국의 코미디언 밥 호프는 레이건 대통령에 대해 말했다. “레이건은 전형적인 정치가가 아니다. 거짓말하고 사기치고 도둑질하는 법을 모르기 때문이다. 그는 그런 일을 항상 대변인에게 떠넘긴다.” 코미디 황제의 재치가 번득인다.

아부 앞에서는 남녀 간 차이도 없는 듯하다. “미인에게는 지성을 칭찬하고 지적인 여성에게는 미모를 칭찬하라”는 플레이보이의 좌우명을 만들어낸 것은 바로 카사노바였다. 헨리 클레이 미국 국무장관은 자기 이름을 기억하지 못한다고 푸념하는 한 부인에게 말했다. “지난번 뵀을 때 당신의 뛰어난 미모와 업적 때문에 당신 이름이 곧 바뀌리라고 확신했기 때문이오.” 순간 그녀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어리석은 자는 큰 바보를 만난다

인간의 아부에는 끝이 없다. 또 세 치 혀는 듣는 사람의 이성을 마비시켜 심장을 찌르는 비수가 되기도 한다. 역아증자(易牙蒸子)라는 말이 있다. ‘역아가 아들을 삶다’라는 뜻이다. 중국 춘추시대의 제 환공은 미식가였다. 하루는 그가 “자신이 맛보지 못한 고기는 사람고기밖에 없다”고 말하자 역아가 자기 자식의 머리를 삶아 바쳤다.

프랑스의 루이 14세는 시를 쓰는 취미가 있었다. 그의 시를 읽은 한 대신의 평가는 아부의 극치를 보여준다. “폐하, 소신은 폐하의 재능에 탄복했습니다. 서툰 시를 쓰려고 하면 이처럼 서툰 시를 금방 쓰실 수 있으니까요.” “지금 몇 시인가?” “폐하께서 원하시는 시간입니다.” “자네는 몇 살인가?” “폐하께서 좋으시도록 정해 주십시오.” 루이 14세는 이런 대답을 자신에 대한 절대 복종으로 여겨 기뻐했다. 어리석은 자는 언제나 자기를 찬미하는 가장 큰 바보를 만난다고 했던가.

지나친 아부는 듣는 사람뿐 아니라 세상을 해롭게 한다. 시인 에머슨이 말한 것처럼, 사람들이 아부를 좋아하는 것은 누군가 비위를 맞춰야 할 만큼 자신이 중요한 사람이라고 느끼게 하기 때문이다. 아부에 취하면 자신의 능력을 과신하게 되고 이는 실수로 이어진다. 또 아부는 중독성이 강하다. 마약과 같아 갈수록 더 큰 아부를 찾게 된다. 미국 부통령을 지낸 애들레이 스티븐슨이 말했다. “들이마시지만 않으면 아부는 좋은 것이다.” 아부의 시대를 사는 우리 모두가 마음에 새겨야 할 금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