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두현 논설위원
[ 고두현 기자 ]
6·25전쟁 때 월남한 피란민들이 서울 청계천 판자촌으로 몰렸다. 대부분은 맨손이었으나 개중에는 재봉틀을 안고 온 사람도 있었다. 이들은 삯바느질과 재봉틀질로 생계를 꾸렸다. 지게꾼은 원단을 져다 날랐다. 1961년에는 번듯한 상가건물을 짓고 이름을 평화시장이라고 붙였다. 평화통일의 꿈을 담은 이름이었다.
1968년 서울에서 전차가 사라지고 차고지였던 동대문에 종합시장이 건립됐다. 곧이어 고속버스터미널도 들어섰다. 전국에서 사람과 물건이 모이자 평화시장과 동대문종합시장 일대는 한국 봉제·의류산업의 메카가 됐다.
전후 판자촌에서 태동한 봉제산업은 1960~1970년대 경제성장의 밑거름이 됐다. 1970년대 후반에는 땅값과 인건비 때문에 인근 창신동으로 공장을 이전했다. 이후 값싼 중국산에 밀리면서 ‘사양산업’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그러나 2010년대 들면서 부활의 조짐이 보였다. 지금 창신동에는 봉제공장이 1000개 이상 있다.
이곳 사람들은 대부분 ‘시다(보조원)’로 출발해 수십 년간 기술을 쌓은 장인이다. 30~40년 넘는 경력자도 수두룩하다. 경제성장기에 섬유 수출을 이끈 산업역군들이 이제 50~60대가 됐다. 피란민 자녀가 대를 잇는 곳도 많다. 이들은 한류 바람을 타고 동대문의류상가를 ‘K패션’의 중심지로 키운 숨은 주역이다.
이들 덕분에 동대문시장을 거점으로 한 ‘K패션’ 스타트업들이 급성장하고 있다. 연 매출 1000억원을 넘는 온라인 쇼핑몰 기업들도 늘고 있다. 최근에는 인공지능(AI)과 빅데이터를 패션에 접목해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다. 의류 도매상에서 디자인한 뒤 창신동으로 보내면 며칠 만에 제품이 나오기 때문에 속도에서도 단연 앞선다.
창신동에서 단순 임가공 단계를 넘어 ‘메이드 인 코리아’ 제품으로 브랜드 파워를 키우는 곳도 있다. 30여 년째 봉제산업에 종사해온 우병오 낙산패션 대표는 창신동 이름을 본떠 ‘창신사’라는 자체 브랜드를 만들었다. 상인들은 “한국 봉제산업의 부활에는 무허가 판잣집에서 시작한 창신동 장인들의 역할이 무엇보다 컸다”고 입을 모은다.
하지만 봉제 장인들은 “이브 생 로랑 같은 유명 디자이너들도 재단이나 봉제부터 시작했는데 우리를 아직 ‘불쌍한 노동자’로 보는 시각이 많아 섭섭하다”고 말한다. “해외에서는 ‘소잉 마스터(sewing master·봉제 장인)’라고 부르며 대우해 주잖아요. 샤넬도 장인들을 우대했죠.”
창신동 골목 끝에는 ‘이음피움’이라는 이름의 봉제역사관이 있다. 과거와 현재를 잇고 미래를 꽃피운다는 의미다. 이곳 장인들이 한 땀 한 땀 일군 창신(昌信)동의 역사에서 새로운 패션신화를 창조하는 창신(創新)의 꽃이 만개하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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