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훈의 한국경제史 3000년
(24) 시장경제의 대두
15~16세기 대항해시대 이후
中·日 틈바구니서 피해본 조선
17세기 淸·日간 상선 행렬 끊기자
60년간 양국 사이서 중계무역
中에 사행단 파견 때 사무역
日과는 국교정상화 후 공무역
1686∼1697년 중계무역 절정기
통화 450만냥 전국서 유통
18세기 후반 1062곳서 5일장
장시권 인구는 대략 3500호
곡류·면포·어물 등 물물교환
대항해시대의 파도
1492년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했다. 이후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주도하는 대항해시대가 열렸다. 16세기 후반에는 동아시아의 바다도 스페인과 포르투갈 상인의 활동 무대가 됐다. 그들은 신대륙의 은을 가지고 와서 동남아시아와 중국의 향료, 비단, 도자기, 차를 구했다. 중국은 세계의 은을 흡인하는 블랙홀이었다. 한반도에 밀려든 대항해시대의 파도는 경제적이라기보다 군사적이었다.
1570년대 일본이 오랜 전국(戰國)시대의 혼란을 벗어나 통일국가의 성립을 본 것은 포르투갈 상인이 들여온 철포(鐵砲)를 구사한 새로운 군사기술에 의해서였다. 1592년 통일 일본은 명(明)으로 들어간다는 명분을 걸고 조선을 침공했다. 1570년대 이후 황량한 만주 벌판에서 또 하나의 군사세력이 성장했다. 여진족의 청(淸)은 1644년 베이징을 점령하고 중원을 차지하는 일대 이변을 연출했다. 조선왕조는 왜란에서 자신을 구원해 준 명과의 의리에 구속돼 청과의 외교에서 실패했으며, 청의 두 차례 침공을 받고 그에 복속했다.
일본과 청의 군사적 침공은 조선에 참담한 피해를 안겼다. 1603년 조선왕조의 과세지는 16세기 중반의 151만 결에서 81만 결로 줄었다. 1639년 왕조가 파악한 호(戶)의 총수는 16세기 중반의 절반인 44만 호에 불과했다. 그렇지만 그렇게 밀려온 대항해시대의 여파는 빈사(瀕死)의 조선왕조가 이후 2세기 반은 더 존속할 수 있는 자양분을 선사했다.
대청 무역
1661년 청은 해금령(海禁令)을 발동해 바다에서의 자유항행을 금지했다. 해양에서 활동하는 명의 잔여 세력을 섬멸할 목적에서였다. 이로 인해 청과 일본을 오가던 상선의 행렬이 끊어졌다. 이후 60년간 조선은 청과 일본을 중계하는 무역의 이익을 듬뿍 누렸다. 1636년 조선은 청과 조공·책봉체제를 맺었다. 이후 조선은 연평균 2회의 사행단을 베이징에 파견했다. 조선은 청의 황실에 공물을 진상하고 회사품을 수령했다. 청과의 조공무역은 조선으로서는 적지 않은 부담이었다.
그렇지만 사행단의 왕래에 편승해 사무역(私貿易)이 이뤄졌으며, 그로부터 얻는 이익이 적지 않았다. 1680년대 1회의 사행단이 베이징으로 지참하는 은은 7만∼8만 냥(1냥=37.5g)에 달했다. 은을 공급한 것은 한성, 개성, 의주의 상인들이었다. 사행단의 사무역은 국경 건너의 책문(柵門)에서도 벌어졌는데, 이쪽의 규모가 더 커서 1회의 거래가 50만∼60만 냥에 달했다. 사무역에서 조선의 주요 수출품은 은·인삼·피물이며, 주요 수입품은 백사(白絲)·비단이었다.
대일 무역
조선과 일본의 무역은 1609년 국교가 정상화함에 따라 이전과 마찬가지로 공무역(公貿易)의 형식으로 재개됐다. 해마다 대마번(對馬藩)이 40척의 무역선으로 일본산 은·동과 남방 물산 호초(胡椒·후추)·단목(丹木) 등을 바치면, 조선은 경상도에서 조세로 수취한 면포와 쌀을 지급했다. 그 양은 1660년 이후 면포 1021동(1동=50필)과 쌀 1만6000석으로 고정됐다. 이외에 동래부 초량에 설치된 왜관(倭館)에서 양국 상인이 5일마다 거래하는 사무역이 벌어졌다. 부지 33만㎡(약 10만 평)의 왜관은 460여 명의 일본인이 상주하면서 조선과의 무역을 중개하고 조선의 정보를 염탐해 본국에 전달하는 역할을 맡았다. 중국에서 수입한 백사가 일본으로 흘러간 것은 왜관에서 벌어진 사무역을 통해서였다. 1694년 대일 사무역에서 수출품의 60%는 중국산 백사였다. 중국산 견직물은 4%였다. 나머지 36%는 조선의 인삼이었다. 인삼은 희귀한 약재로 일본에서 그에 대한 수요가 컸다.
중계무역의 이익
중국의 백사와 일본의 은을 연결하는 중계무역에서 조선이 벌어들인 이익은 대단했다. 백사 100근의 수입 가격은 은 60냥인데, 그것의 수출 가격은 160냥이나 됐다. 1683년 대만에서 농성한 명의 잔여 세력이 멸망했다. 뒤이어 청의 해금령이 해제되지만 이후에도 조선의 중계무역은 활황을 유지했다. 1684∼1717년 조일(朝日) 사무역의 규모는 연평균 은 60만 냥(23t)에 달했다. 이는 같은 기간 일본이 네덜란드 상인과 행한 무역의 두 배다. 중계무역은 1686∼1697년이 절정기였다. 이후 일본이 은 유출을 억제하고 견직물을 국산화하는 정책을 추진함에 따라 조선의 중계무역은 점차 위축됐다. 일본은 인삼마저 국산화를 추진해 성공했다. 그럼에도 1750년까지 은을 실은 대마번의 무역선은 꾸준히 왜관으로 건너왔다.
동전의 유통
1678년 조선왕조는 상평통보(常平通寶) 동전의 유통에 성공했다. 중계무역이 벌어들인 대량의 은은 국내의 상업경제를 자극했다. 그에 따라 교환수단에 대한 수요가 증가했는데, 쌀이나 포의 현물화폐로는 감당할 수 없었다. 동전을 대량 주조하기 위해서는 원료 동(銅)이 충분히 공급돼야 했다. 그 문제는 풍족해진 은으로 일본에서 수입하면 됐다. 1678년 실험적으로 소량 주조된 동전은 이후 본격적으로 발행돼 17세기 말까지 약 450만 냥에 달했다. 그 무렵 동전의 유통은 전국 8도에 미쳤다. 지방에 따라 약간의 시차는 있었다. 1710년대가 되면 “나물 캐는 할미나 소금 굽는 더벅머리 사내조차 곡물을 버리고 동전을 구할 정도”로 동전의 유통은 일반화했다.
18세기에 들어 조선왕조는 한동안 동전의 주조를 중단했다. 동전의 유통으로 고리대의 폐해가 생겼기 때문이다. 곡가가 높은 봄에 1냥을 빌려주고 곡가가 낮은 가을에 이자를 붙여 1냥 5전을 회수한다고 치자. 동전으로 따진 이자율은 50%지만, 곡물로 계산한 실질 이자율은 그보다 훨씬 높다. 이런 폐단으로 인해 동전의 유통을 폐지하자는 주장이 제기돼 동전의 발행은 1720년대까지 중단됐다. 그러자 일상적 거래에 지장이 생길 정도로 화폐가 부족해졌다. 1730년부터 조선왕조는 동전을 다시 발행했다. 이후 1860년대까지 조선왕조가 주조한 동전은 1600만 냥 정도였다고 추정되고 있다.
장시의 확산
동전의 유통과 더불어 5일마다 열리는 농촌 장시가 널리 확산했다. 전라도 순천에서 장시는 1618년만 해도 2곳에 불과했다. 한 곳은 5일마다의 5일장, 다른 한 곳은 10일마다의 10일장이었다. 1729년까지 순천의 장시는 9곳으로 늘었는데, 모두 5일장이었다. 그사이 큰 변화가 언제 생겼는지는 알 수 없지만 1660년대 이후 중계무역이 활성화하고 동전이 널리 유통된 것이 큰 계기였음은 분명하다. 순천의 장시는 1770년까지 13곳으로 증가했다. 크게 말해 1660년대 이후 1770년대까지 조선의 경제는 양적으로 성장 추세였다.
장시의 전국적 분포는 1770년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에서 처음으로 보고됐다. 전국의 장시는 총 1062곳이었다. 대부분의 장시는 5일장이었다. 개별 장시권의 반경은 경기 이남에서는 평균 6∼7㎞였다. 반면 인구가 희박한 함경도에서는 27㎞나 됐다. 함경도를 제외하면 대개 하루 만에 돌아올 수 있는 거리에 하나의 장시가 위치했다. 당시 조선의 인구는 대략 1700만 명이었다. 이에 개별 장시권의 인구는 1만6000명으로 농가 3500호 전후였다. 농민들은 한 달에 1회, 많게는 2회 장시에 나갔다. 이에 장시 당 시집인(市集人)은 적게는 600명, 많게는 1200명 정도였다.
거래의 성격
장시는 거래를 위한 시설이나 건물을 갖추지 않았다. 사람들이 모였다가 흩어지면 공터가 되는 것이 장시였다. 가장 널리 거래된 재화는 쌀, 콩, 보리의 곡류였다. 그다음은 면포, 마포, 저포의 의류와 어물, 젓갈, 소금, 미역 등의 해산물이었다. 뒤이어서는 연초, 채소, 과일, 용기, 농구의 순서였다. 철기의 장시 거래는 그리 많지 않았다. 1830년대 조사에 의하면 장시의 거래 품목은 대략 300종에 불과했다. 거래의 상당 부분은 출시인 간의 물물교환이었다. 농민과 상인의 거래라고 해도 지역에서 생산되지 않는 비(非)자급 생활자료를 구하기 위한 간접적 물물교환의 성질을 벗어나지 않았다. 감영 소재지나 주요 포구에는 시집인이 수천 명에 달하는 대장(大場)이 열렸지만, 도·소매업의 분화와 그에 따른 장시 간 위계의 성립은 일반적이지 않았다.
이영훈 < 前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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