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ㅣ 추상미 "영화 제작으로 산후우울증 극복…감독 되고부터 타인에 더 관심"

입력 2018-10-23 13:23
영화 '폴란드로 간 아이들' 추상미 감독



10년 만에 추상미가 돌아왔다. 배우가 아닌 장편 다큐멘터리 영화 연출자다.

2009년 SBS '시티홀'. 카메라에 담긴 배우 추상미의 마지막 작품이다. 이전까지 안정적인 연기로 드라마와 영화, 연극까지 다방면으로 활약했던 추상미는 홀연히 연출 공부를 시작했다. 2010년 단편 영화 '분장실', 2013년 '영향 아래의 여자'를 발표하고, 올해 처음 장편 다큐멘터리 영화 '폴란드에 간 아이들'을 내놓았다. 장편 극영화 '그루터기들'을 준비하는 과정을 담은 프리뷰로 배우 오디션과 폴란드 현지 답사 과정을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이지만 올해 부산국제영화제 와이드앵글 부문에 공식 초청받으며 일찌감치 작품성도 인정받았다.

10년 동안 감독이 되기위해 차근차근 자신의 길을 닦아온 추상미를 만났다.

▶연출자로서 작품을 본 소감이 궁금하다.

제가 1년 동안 편집을 하면서 잡고 있었던 작품이라서 만족감보다는 '오류가 있을까' 걱정이 컸다. 관객들 반응을 살피기에 바빴다.(웃음) 예산이 부족하다보니 많은 걸 감수하고 제가 직접 하게됐다. 자막도 직접하고, 음악도 제가 깔았다. 그러니 실수를 하지 않을까 걱정이 되더라.

▶몰입하기 힘들었을 것 같다.

스토리에 젖어들지 못했다. 내부 시사를 서울극장에서 2회 정도 했는데, 그때 관객들과 섞여서 봤다. 그런데 영화를 보기보단 관객들의 표정을 봤다. 화장실 가는 분들을 보면서 '아, 이 부분이 집중이 안되나' 자책하고 그랬다.

▶ 부산국제영화제에 초청이 됐다. 그때 반응이 응원이 됐겠다.

한 편의 드라마 같았다. 저희 영화 GV가 있던 날, 태풍 콩레이가 정점을 찍으며 부산을 때리고 지나갔다. 저희 숙소 옆 공사장에서 쇠막대기가 날라다녔다고 하더라. 영화제 측에서도 태풍이 심해 상영이 취소됐다고 연락이 왔는데, 우린 숙소랑 상영관이 가까우니까 관객들이 그냥 돌아가면 미안하니 인사하러 가자고 갔었다. 그런데 150명이 태풍을 뚫고 와 계셨다. 배급사 대표님은 안경이 날라가서 깨지고, 음악감독님도 허벅지에 날라오는 뭔가에 맞아서 멍이 들 정도였는데. 이 정도로 위험한 상황인데 왔구나 싶어 감사함에 눈물이 났다.

▶관객들 반응은 어땠나.

상영을 끝내고 얘기를 나누던 중 어떤 분이 '내가 탈북민인데, 고등학교 선생님이 폴란드에 갔던 전쟁고아였다'고 하더라. 그러면서 '어린이집을 하고 있는데, 통일이 되면 북한에 가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싶다. 폴란드 선생님한테 많이 배웠다'고 하면서 '폴란드 선생님들이 사랑해줘서 감사하다'고 우는데, 감동의 도가니였다.

▶ 레드카펫엔 영화에 출연했던 탈북민 배우 이송도 함께 섰다.

와이드 앵글 부문은 작아서 감독만 참석할 수 있는데, 제가 함께하고 싶다고 했다. 너무 감격스러웠다. 개막작도 '뷰티풀 데이즈'인데 이나영 씨가 맡았던 역할이 겪은 사건 중에 송이의 경험과 비슷한 부분들이 있더라. 보면서 계속 울었다. 엔딩도 새로운 가족에 대한 이야기라 송이에겐 희망이 되는 영화가 아닐까 싶었다.

▶ '폴란드로 간 아이들'은 어떻게 준비하게 된 건가.

산후 우울증 증상이 있었다. 아이에 대한 집착이 심해지고, 드라마, 영화를 봐도 제 아이에 대입해 과하게 몰입하면서 조금이라도 슬픈 장면이 나오면 울고, 우울해 했다. 그때 'KBS스페셜'로 북한 꽃제비에 대해 나왔다. 우울증을 극복하기 위해서라도 장편 영화를 빨리 준비해야겠다고 마음 먹었던 상황이었고, 북한 아이들에 대해 해보는 게 어떨까 싶던 와중에 운명처럼 대학 후배가 일하는 출판사에 갔다가 이 자료를 보게 됐다.

▶ 영화 초반부에 극 영화를 준비했다고 나오는데, 처음부터 다큐멘터리와 함께 작업하는 걸로 기획을 한 건가.

처음엔 온전히 극영화였다. 폴란드에서 소설로 나온 김귀덕이란 북한 소녀를 영화화 하려 했다. 한국전쟁 후 고아가 돼 폴란드에 갔다가 병에 걸려 돌아오지 못한 소녀였다. 그러다가 폴란드 선생님들이 아직 살아계시고, 그분들의 증언을 남겨야겠다는 생각을 하게됐다. 그래서 시나리오 리서치를 하면서 촬영을 하기 위해 헌팅도 하고, 촬영도 받고, 다큐도 찍었다.

▶ 폴란드 선생님들을 섭외하면서 어려움은 없었나.

더 많은 분들을 하고 싶었는데, 마지막까지 갈등하다가 거절한 분들도 있었다. 어떤 분은 촬영 일주일 전에 넘어져서 얼굴이 갈리는 사고를 당해 못하기도 했다. 또 다른 분은 북한 정부의 관계 때문에 안된다고 했다. 폴란드가 사회주의에서 민주주의가 된 게 얼마 안되서 어르신들은 아직도 그런 분위기가 있는 것 같았다.

▶정치적인 균형을 잡는 것이 어렵진 않았나.

인간애로 접근했다. 폴란드 선생님들은 당의 명령으로 소집됐지만, 독실한 카톨릭 신도였다. 폴란드 등 동유럽 국가들은 카톨릭 전통이 깊어서 다른 사회주의 국가들과 다르게 유신론 사회주의였다고 하더라. 그렇게 신앙과 세대, 인종과 이념을 초월해서 한국 전쟁 고아들을 품었다. 그 자체가 메시지라고 생각했고, 그걸 담으려 했다.

▶탈북 아이들로 시작해 전쟁 고아, 그리고 그들을 돌보던 선생님의 이야기로 확장되는 구조가 인상적이었다.

상처의 연대가 아닐까. 폴란드 선생님들도 2차 세계대전을 경험했고, 그 아픔을 겪었기에 아이들을 더 보듬었던 것 같다. 저 역시 우울증을 겪지 못했다면 그렇게 하지 못했을 것 같다. 저 역시 영화를 촬영하면서 치유와 극복의 여정을 겪었다.

▶ 영화 '그루터기들' 출연 배우 중에서 이송과 함께한 이유가 있을까.

과하게 밝았다. 그리고 과거의 상처를 얘기하지 않았다. 그런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었다. 초반엔 말하지 않았다. 아이들에게도 트라우마일 수 있고, 조금이라도 말을 할라 치면 '날 취조하는 거냐'고 경계했다. 제가 추궁할 권리가 없기 때문에 친해지고, 오픈할 때까지 기다렸다. 탈북 이후 국정원에서 굉장히 오랜 시간 질문을 받고 취조를 당하니 그런게 아닐까 싶었다.

▶ 이송이 마음을 연 건 언제였을까.

(이송이) 북에서 왔다고 하니까 폴란드 선생님이 안아 주면서 '고생했다'고 하고, 손도 잡아줬다. 그때 송이도 감정이 북받친 거 같다. 어느 순간 마음의 빗장이 풀리면서 본인의 상처를 대면하기 시작했다. 영화에서 담을 수 없는 이야기는 호텔방에서 같이 했다. 탈북 청소년이 겪는 일들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였다. 제 삶에 불평한 것이 부끄러워 질 정도였다.

▶ 연출자이면서 이송과 함께 카메라 앞에 선다. 이 부분 역시 결심히 필요한 부분이 아니었을까.

처음엔 송이만 프리젠터로 할까 했다. 그런데 구조가 제대로 나오지 않을 것 같았다. 영화 시나리오를 완성하는 과정을 자연스럽게 노출하자고 했고, 그래서 함께가는 걸로 됐다. 영화 촬영을 마치면서 폴란드 선생님과 아이들처럼 저도 송이와 그런 관계가 될 수 있겠구나 했는데, 송이가 마지막 인터뷰에서 그런 말을 해서 놀랐다.

▶ 극 영화는 언제쯤 볼 수 있을까.

빠르면 내년 정도? 폴란드에 가서 북한 아이들 뿐 아니라 남한 아이들이 섞여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그 내용을 포함해서 수정 중이다. 픽션과 논픽션이 섞여 있다. 조금 더 고민을 해봐야 할 것 같다.

▶ 앞으로 연출만 할 생각인가.

연출 공부가 쉽진 않았다.(웃음) 투자했으니, 써먹어야 하지 않겠나. 카메라 앞에 서는 것에 대한 아쉬움은 없다. 연출을 하면서 세상과 소통하고, 사회적 이슈에 더 민감하게 된 것 같다. 타인에 대한 관심도 생기고, 이 시대, 이런 시점에 어떤 예술을 할 수 있을까 고민하고 있다. 문화와 예술이라는 게 꼭 그런 기능을 해야하는 건 아니지만, 제가 하고 싶은 건 그런 부분이다.

김소연 한경닷컴 기자 sue123@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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