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바꾸는 밀레니얼 파워
인맥 관리할 시간에 자신에게 집중
남에게 어떻게 보일 것인가보다
나에게 얼마나 큰 만족 줄까 고민
내집 마련·노후 준비 언제 하냐고?
불확실한 내일보다 오늘에 투자
이것이 돈을 쓰는 유일한 잣대
가격 비교·리뷰 검색하고 구매
SNS 통한 대리체험까지
강력한 네트워크로 무장
불매운동·개념소비 주도
소비시장 ‘큰손’으로 급부상
[ 오상헌/고재연 기자 ]
광고회사에 다니는 정수영 과장(33)의 인생 모토는 ‘욜로’(YOLO·You Only Live Once)다. “그때 그걸 했어야 하는데”란 후회를 남기지 않겠다고 그는 매일 다짐한다. ‘내집 마련’은 정 과장의 머릿속에 없다. 직장에서 번 돈의 대부분은 ‘나, 경험, 재미’를 위해 쓴다. “내 공간을 내 마음대로 꾸미고 싶다”며 부모님 집과 겨우 15분 거리에 있는 옥탑방에 둥지를 튼 지 벌써 5년째. 오로라를 보기 위해 아이슬란드행 비행기에 몸을 싣고, 원조 모히토를 마시러 쿠바의 수도 아바나를 찾기도 한다. 이런 그를 직장 상사들은 “나와는 다른 인종”이라며 달가워하지 않는다. 하지만 또래들은 “우리가 꿈꾸는 밀레니얼 라이프 스타일의 전형”이라며 전폭적인 지지를 보낸다. 전문가들은 밀레니얼 세대가 기존 베이비붐 세대나 X세대와는 확연히 다른 특성을 보인다고 설명한다. 밀레니얼(millennial)이라는 단어의 10개 알파벳에 이들의 특징을 담았다.
Me, me, me generation
밀레니얼 세대에게 세상의 중심은 ‘나’다. ‘인맥이 자산’이라며 인적 네트워크를 쌓는 데 골몰했던 베이비붐 세대나 X세대와는 다르다. “인맥 관리할 시간에 나 자신에 집중하자”고 스스로를 다그치는 세대다. 심지어 부모 형제와 맞닥뜨리는 스트레스를 피하려고 독립하기도 한다. ‘혼밥’ ‘혼술’ 트렌드가 나온 배경이다. ‘혼자 놀기’는 최근 들어 ‘나만의 공간’과 ‘나만의 취미’를 결합하는 방식으로 진화하고 있다. 낚시카페, 만화카페, 체험카페 등이 대표적이다. 아예 집 한쪽을 카페나 포장마차로 꾸미는 밀레니얼도 늘고 있다. 이들은 돈을 쓸 때도 ‘남에게 어떻게 보일 것인가’보다 ‘나에게 얼마나 큰 만족을 줄 수 있는가’를 잣대로 삼는다. 김난도 서울대 소비자학과 교수는 “로봇청소기가 밀레니얼에게 인기있는 이유는 청소에 들일 시간을 자신에게 투자할 수 있는 시간으로 바꿔주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Interest
주말 단체 산행을 소집하거나 갑작스럽게 저녁 회식을 제안하는 부서장은 밀레니얼 직장인 사이에서 ‘극혐’(극도로 혐오)으로 통한다. ‘워라밸’(일과 삶의 균형)을 좇는 이들에게 평일 저녁 또는 주말은 취미활동이나 자기계발을 위한 소중한 시간이다.
여가활동을 중개하는 사이트인 프립을 찾는 밀레니얼이 갈수록 늘어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카약 댄스 당구에서부터 수제 맥주 만들기까지 이 사이트에 개설된 2500여 개 ‘원데이 클래스’에 매월 평균 7000~8000명이 참석한다. 이렇다 할 취미가 없는 사람들에게 한 달에 한 번 건담 프라모델 조립, 핸드드립 커피 만들기 등 ‘취미 박스’를 보내주는 하비박스와 같은 업체들이 생겨난 것도 같은 이유다. 곽금주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는 “X세대에게 ‘퇴근 후 삶’은 근무의 연장이거나 다음날 더 일을 잘하기 위해 잠시 쉬는 시간이었지만 밀레니얼에게는 나에게 투자하는 시간으로 바뀌었다”고 말했다.
Log-in
밀레니얼은 PC, 휴대폰과 함께 자란 세대다. 어릴 때부터 인터넷을 통해 세상에 ‘로그인’한 디지털 네이티브다. 정보기술(IT) 기기에 익숙하고, 각종 정보 검색에 능하다. 소비시장에서 ‘밀레니얼 입김’이 셀 수밖에 없는 이유다. 이선화 삼성전자 글로벌마케팅센터 프로는 “밀레니얼은 어떤 제품을 살 때 가격 비교는 물론 소비자 리뷰 등도 꼼꼼히 살핀다”며 “지갑을 여는 건 베이비붐 세대인 부모지만 실질적인 브랜드 결정권은 밀레니얼이 쥐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한 ‘대리 체험’이 인기를 끄는 것도 밀레니얼에게 나타나는 특성 중 하나다. 직접 반려동물을 키울 형편이 안 되는 밀레니얼들은 SNS를 통해 ‘찜’한 동물의 근황을 지켜보며 함께 응원하고 분노한다. 유기견 ‘인절미’가 인스타그램 팔로어 90만 명을 거느린 ‘스타’가 된 배경이다. ‘랜선 집사’(인터넷망을 연결하는 랜선과 집안을 돌보는 집사를 합한 신조어)에서 시작된 대리 체험은 ‘랜선 이모’ ‘랜선 애인’ 등으로 범위를 넓혀가고 있다.
Luxury but small
‘3포(연애·결혼·출산 포기) 세대’로 통하던 밀레니얼은 언젠가부터 ‘N포 세대’로 불리기 시작했다. 포기해야 할 게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는 의미다. ‘부모보다 가난한 첫 세대’로 꼽히는 밀레니얼은 그래서 ‘작은 사치’로 눈을 돌린다. 고급 제품을 내 것으로 만들었을 때의 행복을 느끼기 위해서다. 김지연 LG전자 미래고객전략팀장은 “밀레니얼이 가장 갖고 싶어하는 전자제품으로 100만원대 드롱기 커피머신, 30만원대 발뮤다 토스터 등 럭셔리한 소형가전을 꼽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55만원이 넘는 다이슨 헤어드라이어와 5만원짜리 모나미 금장 153볼펜이 히트상품 반열에 오른 것도 같은 맥락이다. 곽 교수는 “밀레니얼 소비 특성 중 하나는 가성비를 넘어 ‘가심비’(가격 대비 심리적 만족도)를 따진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Experience
밀레니얼 세대는 ‘소유’보다 ‘경험’에 투자한다. 삼성카드가 지난해 20대와 30대 회원의 카드 사용 내역을 분석한 결과 여행 관련 사용액은 2014년에 비해 각각 63%와 69% 증가했다. 같은 기간 콘서트 박물관 경기장 등 문화생활에 쓴 비용도 20대는 143%, 30대는 91% 늘었다. 2014년 3만~4만 명 수준이었던 서핑 인구가 지난해 20만 명 수준으로 불어나는 등 체험 스포츠도 인기다. “X세대가 경험의 맛을 알게 된 첫 세대라면, 밀레니얼 세대는 소비의 중점을 소유에서 경험으로 바꾼 첫 세대”(김용섭 날카로운상상력연구소 소장)란 해석은 이래서 나온다.
밀레니얼 세대의 ‘낮은 소유욕’은 렌털시장 확대로 연결됐다. 정수기와 자동차에서 시작한 렌털시장은 이제 여행용 가방, 침대 매트리스, 안마의자 등으로 넓어졌다. 2012년 문을 연 카셰어링 업체 쏘카의 회원 수도 400만 명으로 불었다. 지난해 25조원이었던 렌털시장 규모는 2020년 40조원 안팎이 될 전망이다.
Now
‘소확행’(작지만 확실한 행복)이란 말을 처음 쓴 사람은 일본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다. 그는 1994년 《랑겔한스섬의 오후》란 수필집에서 ‘갓 구워낸 빵을 손으로 찢어서 먹는 것’ ‘서랍 안에 반듯하게 접은 속옷이 잔뜩 쌓여 있는 것’ 등 일상에서 느끼는 작은 행복을 이렇게 표현했다. 하루키가 만든 신조어는 20여 년 뒤 한국 밀레니얼 세대의 가치관을 보여주는 키워드로 되살아났다.
밀레니얼 세대는 소확행을 ‘불확실한 내일보다는 확실하게 행복을 느낄 수 있는 오늘에 투자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이고 있다. 우리 사회를 지배했던 ‘조금만 참으면 취직도 되고 승진도 하고 소득도 늘 것’이란 꿈이 깨지면서 행복에 대한 인식이 △미래에서 현재로 △특별함에서 평범함으로 △강도에서 빈도로 바뀌었다는 얘기다.
Nomad
27.7%. 한국경영자총협회가 312개 기업을 대상으로 조사한 대졸 신입사원의 1년 내 퇴사율(2016년 기준)이다. 2010년 15.7%에서 6년 만에 12.0%포인트 높아졌다. ‘최악의 실업난’을 이겨낸 이들을 다시 취업 전선으로 내몬 가장 큰 이유는 ‘조직문화 및 직무 적응 실패’(49.1%)였다. 직장을 옮겨다니는 밀레니얼 노마드(유목민)가 늘다 보니 ‘퇴사학교’마저 생겼다. 2016년 개소한 뒤 5000명이 넘는 ‘퇴준생(퇴직준비생)’이 다녀갔다.
극심한 취업난과 밀레니얼의 노마드적 특성이 맞물리면서 ‘프리터(free+arbeiter·자유로운 노동자)’도 늘고 있다. 이들은 하루 4~8시간 정도 편의점 아르바이트, 해외 ‘워킹 홀리데이’ 등 비정규직으로 일한다. 이렇게 모은 돈은 취미활동과 자기계발에 쓴다. 아르바이트 포털 알바몬의 지난 5월 설문조사에 따르면 20~30대 알바생의 30% 이상은 스스로를 프리터라고 생각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Impatlent
모바일 드라마 제작사 플레이리스트가 작년 3월 내놓은 ‘연애플레이리스트’는 웹드라마업계의 전설로 불린다. 조회 수는 총 6억5000만 건에 달했다. 웹드라마가 TV드라마를 압도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줬다는 평가다. 전문가들은 이 드라마의 성공 비결 중 하나로 한 회 5분 안팎의 ‘짧은 재생시간’을 꼽는다. 이동 중에도 부담없이 시청할 수 있는 재생시간, 그에 걸맞은 속도감 있는 전개가 ‘참을성 없는(impatient)’ 밀레니얼 세대를 끌어당겼다는 분석이다. 또 다른 대박 웹드라마인 ‘전지적 짝사랑 시점’의 1회 재생시간은 2분에 불과하다. 밀레니얼 세대가 TV를 보는 방식은 기성세대와 다르다. 큼지막한 TV 스크린보다는 자그마한 스마트폰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보기보다는 유튜브를 통해 핵심만 추려 본다. 속도에 민감한 밀레니얼 세대는 일상생활에서도 지루한 시간을 견디지 못한다. 직장 동료와의 술자리는 어지간하면 1차에서 끝낸다. 장광설을 늘어놓는 사람은 기피 대상 1호다.
Active
오뚜기가 밀레니얼 세대의 ‘최애(最愛: 가장 사랑하는)’ 브랜드가 된 건 작년 초부터다. 그동안의 선행이 뒤늦게 알려진 덕분이었다. 함영준 회장이 1500억원대 상속세를 고스란히 낸 사실이 알려지자 밀레니얼들은 ‘갓뚜기(God+오뚜기)’란 별명을 붙였다. 그리곤 자발적으로 오뚜기의 미담을 찾아내기 시작했다. 이들은 ‘대형마트 시식 사원까지 정규직으로 채용하는 착한 기업’ ‘10년 넘게 라면값을 올리지 않은 뚝심 있는 기업’이란 사연을 SNS에 퍼날랐다. ‘오뚜기 상품 구매운동’에 힘입어 2014년 18.3%였던 라면 시장 점유율은 지난 5월 26.7%로 뛰었다.
김지헌 세종대 경영학과 교수는 “소비자가 자발적으로 불매운동이 아니라 구매운동을 하는 사례가 점차 늘고 있다”며 “SNS를 통해 사방팔방 연결된 밀레니얼은 다른 소비자와 연대해 시장 판도를 바꾸는 적극적 구매자로 진화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밀레니얼은 정치·사회 여론도 주도하고 있다. 시민활동가의 역할을 대신하고 있는 셈이다.
Love for earth
직장 초년생인 구은경 씨(26)는 보디크림을 고를 때 러쉬의 ‘카마크림’만 산다. 경쟁 브랜드보다 비싼 가격(4만2000원·225g)은 ‘착한 기업을 도왔다’는 뿌듯함으로 상쇄된다. 러쉬는 제조 과정에서 동물실험을 하지 않을 뿐 아니라 원료를 구매할 때도 아동 착취 전력이 있는 기업 제품은 사지 않는다는 원칙을 내세운다.
밀레니얼들은 물건을 고를 때 해당 기업이 환경을 파괴하진 않는지, 어려운 이웃을 돕는지 등을 꼼꼼히 따져 ‘착한 기업’ 제품을 선택하는 경향이 뚜렷하다. 페이스북 이용자들은 이런 물품을 산 사람들에게 “개념 소비를 했다”며 ‘좋아요’를 꾹 눌러준다. 이 덕에 환경 보건 빈곤 등 사회적 이슈 해결에 적극적인 기업의 몸값은 치솟고 있다.
오상헌/고재연 기자 ohyeah@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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