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동휘의 한반도는 지금) '업그레이드' 된 문재인 대통령의 중재외교

입력 2018-09-21 14:47


(박동휘 정치부 기자) ‘9·19 평양선언’의 최종 합의문이 발표되기 30여 분 전인 19일 11시 반 무렵, 왼손에 ‘클립보드’를 낀 채 회담장 밖으로 나온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문재인 대통령과 같은 방향으로 발길을 옮기려했다. 때마침 김정은의 ‘그림자’인 김여정 노동당 중앙위원회 제1부부장이 중간에 끼어들었다. 애초 정해진 동선이 있었던 듯, 김여정은 친오빠인 김정은을 돌려세워 회담장 왼쪽으로 사라졌다.

합의문 발표를 위한 최종조율, 더 나아가 향후 한반도 비핵화를 위한 ‘밀담’을 나눈 뒤, 생방송 화면에 잡힌 남북 정상의 모습은 마치 막내 동생이 큰 형을 만나는 듯 했다. 김여정의 안내로 미리 마련된 각자의 공간으로 걸어가기 전, 김정은은 문 대통령을 향해 가벼운 목례를 겸한 눈인사를 나눴다. 서훈 국가정보원장과 김영철 노동당 중앙위 부위원장이 각각 남북 배석자로 참석한 70분의 밀담의 내용이 무엇이었는 지는 꽤 시간이 지난 후에야 밝혀질 것이다. 짐작만 가능할 뿐이지만, ‘문(文)의 중재’가 김정은의 결단을 이끌어냈다는 데는 이견이 없을 것이다.

이 점은 합의문 발표 후 정의용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의 브리핑에서도 읽을 수 있다. 정 실장은 ‘9·19 평양선언’의 의미를 설명하면서 “구체적인 성과도 있었다”며 “대통령께서 발표하신 것처럼 동창리 미사일 엔진실험장과 발사대를 영구적으로 폐기하기로 하고, 미국을 포함한 국제사회의 참관을 허용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문정인 대통령 통일외교안보특보 등 청와대 관계자들은 이번 회담에 앞서 문 대통령이 미·북 비핵화 협상의 재개를 위한 ‘창의적이고 실현 가능한 아이디어’를 가져갈 것임을 여러 차례 밝힌 바 있다.

합의문 내용으로만 보면 아이디어는 두 가지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미국에 대한 직접적인 위협인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관련 시설을 국제사찰 하에 영구 폐기하는 것이 첫째다. CVID 혹은 FFVD라는 미국의 북핵 대응 원칙 중 ‘V(검증가능한)’를 약속한 것이다. 북한 핵실험의 상징적인 장소인 영변핵시설에 대한 불능화 용의를 언급한 것도 문 대통령의 제안으로 합의문에 담겼을 가능성이 높다.

‘9·19 평양선언’은 꽤 정교한 중재외교의 성과다. 김대중, 노무현 정부 때에 비하면 ‘업그레이드’가 상당히 이뤄졌다는 게 전문가들의 평가다. 엄밀히 말하면 2000년 ‘김대중-김정일’ 1차 평양 남북정상회담과 2007년 ‘노무현-김정일’ 평양 남북정상회담은 중재를 위한 게 아니라 ‘우리끼리’라는 자주원칙이 강조된 회담이었다. 김대중, 노무현 정부의 ‘햇볕’ 일변의 대북정책은 심각한 불협화음을 만들어냈다. 한미동맹은 끊임없이 시험대에 올랐다.

문 대통령은 ‘노무현의 비서실장’으로 청와대에 근무하면서 대북정책을 총괄했다. 요즘과 달리 외교안보수석이 비서실장 소속이었으니 현 임종석 대통령 비서실장과 정의용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을 합친 역할을 했다. 당시 ‘문 실장’은 노무현 정부 햇볕정책의 한계를 절감했다. 중국은 6자회담이란 틀을 만들며 미·북 간 중재를 자임했다. 그 결과물이 2005년 ‘9·19 합의’이다. 남북 관계도 좋지 않았다. 북한은 ‘통미봉남’ 정책을 고수했다. 노무현 정부 말기인 2007년 10월4일에 평양에서 역대 두번째 남북 정상의 만남이 이뤄졌지만 합의문에 담을 내용은 빈약할 수 밖에 없었다. 미·북 양자회담의 중재를 성사시키기엔 한미 간 신뢰는 그리 깊지 않았고, 당시 김정일 국방위원장도 선거를 앞둔 한국의 대통령에게 거는 기대가 크지 않았다.

10여 년 전의 실패는 현 청와대의 대북 정책에 큰 자양분이 된 듯 하다. 햇볕정책의 계승에 더해 외교를 통한 적극적인 개입 전략을 펴고 있다는 점이 주목받고 있다. 햇볕정책과 관련해선 정상 간 친교에 주력하고 있는 점이 눈에 띈다. 정상회담의 상시화를 넘어 제도화를 추진하겠다는 것에서 정상 간 친교에 문 대통령이 어느 정도의 무게를 두고 있는 지를 짐작할 수 있다. 한미동맹이라는 또 하나의 중요한 축을 손상시키지 않기 위해 매우 조심스럽게 움직이고 있는 점도 관전 포인트 중 하나다. 청와대 내 대표적인 미국통인 정의용 실장이 미국과 북한을 오가는 ‘메신저’ 역할을 하고 있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20일 이도훈 외교부 한반도본부장은 “미국 뿐만 아니라 일본과 중국, 러시아도 일제히 평양선언의 결과에 환영 의사를 밝히고 우리 노력을 지지하고 있다”며 “2008년 이후 전혀 움직임이 없던 한반도 비핵화라는 분야에서 진전이 있는 것이고, (최근까지도 교착상태에 있던) 미북 대화에 물꼬가 트였다”고 말했다. ‘문(文)의 중재외교’가 효과를 발휘하고 있다는 얘기다. 2005년 9·19 선언을 언급하기도 했다. 이유는 명확하다. 13년 전엔 중국이 중재를 했지만 이번엔 한국이 그 역할을 맡았고, 효과는 더 크다는 자부심이다. 적어도 현재까지 한국의 중재외교는 ‘업그레이드’ 됐고, 결과 면에서도 순항 중이다. 물론, 진짜 ‘본(本)게임’은 이제부터다. (끝) / donghuip@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