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호 기자의 열려라! 우리말] 우리말을 해치는 표현들 (2) '가지다'를 다른 말로 바꿔 보자

입력 2018-09-17 09:01
지난 호에서 살핀 '만들다'와 함께 '가지다'는
우리말에서 무소불위의 힘을 발휘한다.
막강한 위력은 마치 외래어종 배스가
토종 어류를 마구 먹어치우는 것과 흡사하다.


[ 홍성호 기자 ]
문장을 쓰는 방식은 소쉬르의 용어를 빌리면 계열체와 통합체의 조합이다. 계열체란 간단히 말하면 단어를 찾는 일이다. 최적의 단어를 찾아 써야 전달하고자 하는 의미를 정확하게 드러낼 수 있다. 통합체란 그런 단어들을 유기적으로 연결한 것을 말한다. 가령 ‘사과’라는 단어 뒤에는 ‘맛있다, 썩다, 떨어지다, 시다, 붉다…’ 등의 말이 올 수 있다. 모국어 화자라면 누구나 알 수 있다. ‘사과’ 뒤에 ‘잘’이라는 부사가 왔다면 이어지는 말의 수는 대폭 줄어든다. ‘익다’나 ‘먹다’는 그중 일부일 것이다. 이런 말들이 적절한 위치에 배치돼 매끄럽게 연결된 것을 통합체라고 한다.

‘가지다’라는 함정을 피해야

우리가 글을 이해하는 것은 직접적으로 단어의 뜻을 파악해서 아는 것보다 주로 통합체상의 맥락을 통해 이뤄진다. 어떤 말 뒤에 뭐가 올지를 예상할 수 있는 것은 단어들 간에 서로 어울리는 표현이 있기 때문이다. 그 결합 체계가 단단할수록 언어의 생태계는 건강하다. 이런 관점에서 우리말 체계를 위협하는 말 ‘가지다’를 살펴보자.

‘그는 지난 3일 모교인 OO대를 찾아 후배들과 만남의 기회를 가졌다. 이날 대학 본관 200호 강의실서 가진 특강엔….’

언제부터인지 ‘~기회를 가지다’란 문구가 우리말에서 상투적으로 쓰이기 시작했다. 이 표현은 잘 들여다보면 매우 어색하다. ‘만남의 기회를 가졌다’보다 ‘만남의 시간을 보냈다’라고 하는 게 더 자연스럽다. 이를 ‘(후배들과)만났다’고 하면 더 좋다. 훨씬 간결해진다. 이어지는 ‘~에서 가진 특강’도 ‘~에서 한 특강’이면 충분하다.

‘가지다’는 본래 소유하다, 보유하다란 뜻으로 쓰던 말이다. 지금은 의미가 확장돼 10개 이상의 뜻으로 쓰인다. 이 말이 우리말의 다양하고 살가운 표현을 얼마나 좀먹는지 사례 몇 개만 더 들어봐도 금세 알 수 있다.

△생후 1년 미만인 자녀를 가진(→둔) △종교적 공통점을 가졌다(→지녔다) △산업단지 조성 기공식을 가졌다(→열었다) △금융부채를 가진(→금융부채가 있는) △미술에 대해 흥미를 가진(→느낀) 적이 있느냐? △그 단체와 동반자적 관계를 가지다(→맺다) △소통의 시간을 가지다(→보내다) △데뷔 무대를 가졌다(→치렀다) △반감/기대를 가지다(→품다) △새끼를 가진(→밴) 고양이 △그는 사업체를 여럿 가졌다(→뒀다) △같은 조상을 가진(→모신) 단일민족

‘친분을 가지다’보다 ‘맺다’가 세련된 표현

지난 호에서 살핀 ‘만들다’와 함께 ‘가지다’는 우리말에서 무소불위의 힘을 발휘한다. 막강한 위력은 마치 외래어종 배스가 토종 어류를 마구 먹어치우는 것과 흡사하다. 색깔은 ‘띠다’와 어울리는 말인데 ‘강렬한 느낌의 바탕색을 가졌다’라고 하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바탕색을 띠었다’가 자연스러운 우리말 표현이다. ‘기대’ 하면 ‘품다’가, ‘친분’ 뒤에는 ‘맺다’가 이어지던 말인데, 어느 때부터인지 죄다 ‘가지다’가 온다.

‘두다, 치르다, 지니다, 열다, 있다, 느끼다, 품다, 맺다, 보내다, 띠다, 하다….’ 이처럼 다양하게 쓸 수 있는 우리말 서술어를 ‘가지다’가 대체해 가고 있다. 어법적으로 틀렸다는 게 아니다. 쓰지 말라는 것도 아니다. 허용되는 용법이지만, 과도한 사용으로 인한 폐해가 크니 조심하자는 뜻이다. ‘현안에 대한 집중 논의를 가졌다’라고 하기보다 ‘현안을 집중적으로 논의했다’로 쓰는 게 더 자연스러운 우리 어법이다. 기계적으로 바꿀 필요는 없다. 하지만 괄호 안의 말을 살려 써보면 우리말이 훨씬 풍성해진다. 말맛도 살아난다.

hymt4@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