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간편식, 대한민국 밥상을 바꾸다
(5·끝) 5천만 입맛 잡아라
우유·제과·라면·발효유 등
동종업계 '암묵적 평화 체제' 깨져
식품사 50년 만에 첫 무한경쟁
[ 김보라 기자 ]
“신제품을 내놓으면 연간 1000억원어치씩 팔렸거든요. 요즘은 200억원만 해도 대박입니다.”
식품업계 임원들의 하소연이다. 뭘 해도 잘 안 된다는 얘기다. 후렴도 있다. “경기가 정말 안 좋은가 봐요.” 진짜 경기 탓일까. 아니다. 먹거리와 식품에 대한 관심은 그 어느 때보다 높다. 전체 식품·외식 시장은 매년 성장해 205조원 규모(2016년 기준)로 커졌다. 1인당 음식점 수가 세계에서 가장 많은 나라. 그런데도 잘 된다는 맛집은 시간·요일을 불문하고 줄이 길다. 식품업계가 국민소득 3만달러 시대 입맛을 따라가지 못했다는 반성이 나오는 대목이다.
지난 50년간 대한민국 식품회사들은 ‘암묵적 평화 체제’를 유지했다. 각각 1등 제품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CJ제일제당은 햇반, 대상은 종가집김치, 오리온은 초코파이, 농심은 신라면, 빙그레는 바나나맛우유, 롯데제과는 빼빼로, 매일유업은 앱솔루트 분유, 한국야쿠르트는 발효유, 팔도는 비빔면, 정식품은 베지밀…. 이런 1등 제품들은 1970~1990년대에 탄생했다.
경쟁은 동종 업종에서만 하면 됐다. 농심과 오뚜기, 오리온과 롯데제과, CJ제일제당과 대상, 매일유업과 남양유업, 빙그레와 한국야쿠르트 등이 라이벌이었다. 경쟁사가 신제품을 내놓으면 유사품을 출시하는 일이 허다했다. 일본에서 잘 팔리는 식품을 똑같이 베껴 내놓거나, 단기 실적을 올리기 위해 가격을 후려치고 대리점에 밀어내는 방식도 썼다. 라면업계에는 “타사 신제품을 12시간 만에 따라할 수 있다”는 우스갯소리도 있었다.
평화가 깨졌다. 게임의 룰이 바뀌었다. 가정간편식(HMR) 때문이다. 종합식품회사는 물론 우유업계, 제과업계, 유통업계, 라면업계, 발효유업계까지 뛰어들었다. HMR을 안 만드는 곳을 찾기 어려울 정도다. 마트와 편의점, 백화점은 물론 모바일 기반의 스타트업(신생 벤처기업)도 가세했다.
그동안 HMR의 성장 배경을 이야기할 때 ‘수요가 공급을 만든 것’이라는 분석이 많았다. 1인 가구가 늘고, 여성 경제활동 비중이 높아지고, 고령화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식품회사 연구원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생각이 달라진다. 한식 HMR은 재료와 조리 과정이 서양식보다 몇 배 까다롭다. ‘안주야’라는 국내 최초의 안주 HMR을 내놓은 대상의 한 여성 연구원은 2년간 서울 강남 여의도 종로 영등포는 물론 대구 막창골목, 부산 해운대 포장마차까지 안 가본 포장마차가 없다고 했다. 혼자 안주 3~4개를 시키고, 하루에 가게를 10군데 돌아다닌 일도 많았다고 했다. 재료를 찾으러 막창, 닭발 등 부산물 공장을 다닐 때는 온몸에 냄새가 배어 지하철을 못 타는 날도 많았단다.
비비고 만두를 개발하기 위해 300개 넘는 만두를 매일 빚고 중국의 시골 만두가게까지 찾아가봤던 CJ제일제당 연구원, 직원 400명과 그들의 부모님을 모시고 연화식 소비자 테스트를 받아야 했던 현대그린푸드의 연구원, 육개장 개발을 위해 매일 여러 그릇을 먹어 두 달 만에 몸무게가 10㎏ 불어난 편의점 연구원도 있다. 그들의 뒷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공급이 수요를 만들어냈다’는 결론에 다다른다. 그냥 뚝딱 만들어진 제품은 거의 없다.
우유회사와 라면회사가 싸우고, 요구르트 회사가 참치 회사의 적이 됐다. 식품회사의 라이벌이 대형마트가 됐고, 편의점과 식품 스타트업이 다툰다. 1위 식품회사 수장도 ‘초격차’를 이야기한다. 대한민국 식품 역사상 한 번도 없었던 일이다. 사실 소비자에게는 이보다 더 좋은 일은 없다. 대기업의 HMR 납품업체가 되기 위해 지방의 중소 식품회사들도 설비를 재정비하고, 원료 경쟁을 벌인다고 한다. 5000만 명의 입맛을 두고 벌이는 대전(大戰)이다. “몇 년 안에 식품업계가 크게 물갈이 될 것”이라는 이야기는 그래서 울림이 크다.
김보라 기자 destinybr@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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