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기업과 노조를 '강자-약자'로 가르는 이분법, 벗어날 때 됐다

입력 2018-09-09 17:55
“임직원 모두의 희생과 양보가 없다면 사업을 유지할 수 없다. ‘무조건 안 된다’는 태도는 회사를 더 어렵게 할 뿐”이라는 강환구 현대중공업 사장의 공개 호소(한경 9월8일자 A1, 5면)는 노사관계가 고장난 한국 기업들의 현실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 회사 해양사업본부는 46개월째 일감을 수주하지 못해 지난달 21일부터 조업을 중단했다. 최악의 상황에서 회사는 고육지책으로 유휴인력 2000여 명에 대한 희망퇴직과 무급휴업을 추진 중이지만 노조의 반발에 구조조정은 기약 없이 겉도는 딱한 상황이다.

현대중공업이 얼마나 심각하게 ‘고비용·저생산성의 늪’에 빠져있는지는 사장 담화문에 그대로 담겨있다. 1인당 인건비가 중국의 3배, 싱가포르의 6.5배라는 것부터가 놀랍다. 해양사업에서 현대중공업의 인건비 비중은 20%로, 중국(6%) 싱가포르(3%)보다 월등히 높다. 이런 원가경쟁력으로 수주는 불가능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노조는 구조조정에 극렬 반대하며 “회사 내 다른 사업부의 일감을 이전해 달라”는 등 비상식적 주장을 하고 있다. “외주 준 일감을 가져오라”는 주장까지 한다. “협력사 인건비는 우리의 65% 수준이어서 직영하면 인건비가 급증한다”는 강 사장의 설명만 공허하게 울리는 상황이다. ‘인건비를 협력업체 수준으로 낮춰받겠다’고 하지 않는 이상 불가능한 방법을 노조가 들고 나왔다.

강 사장의 절규와 노조의 비이성적 행동에서 기업과 노조를 단순히 ‘강자와 약자’로 가르는 오래되고 도식적인 사고가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음을 절감하게 된다. 경제발전 초기에 만든 ‘갑과 을’, ‘착취’라는 대립적 시각에 바탕한 고용·노동법제들이 만성적 저성장 시대로 접어든 지금 곳곳에서 문제를 악화시키고 있다. 노조의 집단이기주의 행태가 현대중공업만의 일도 아니다. 최근 3년 동안 공적자금을 13조원이나 지원받은 대우조선해양 노동자들도 임금인상을 요구하며 쟁의 중이다. 삼성중공업에서도 인력감축 등에 반발한 상경투쟁 등이 한창이다.

‘한국 조선업 위기’의 와중에 나타나는 조선업계 노조의 행태는 ‘87체제’ 이후 경영현장이 얼마나 왜곡됐는지를 보여준다. 지난 30여 년간 정부는 권력화된 소수 대기업·은행·공기업 노조의 요구에 순응해 노사 법규를 손질해 왔다. 전체 근로자의 10%도 안 되는 거대 사업장 소속 노조원들이 과보호받는 기형적 구조가 이렇게 만들어졌다. 90%의 나머지 근로자들은 오히려 임금격차 확대 등으로 소외당하는 모순적 상황을 지금 현대중공업이 역설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강성 노조’와의 관계에서 이제 약자는 오히려 사측이라는 게 명확해지고 있다. 노조가 막아서면 긴급한 구조조정조차 물 건너간다. 노조는 툭하면 파업에 돌입하지만, 사측의 대항권은 별로 없다. 파업권에 대항하는 수단인 사측의 ‘직장폐쇄’ 카드도 불법 파업시에는 쓸 수가 없다. 파업시 대체근로 역시 선진국 중에선 한국에서만 금지돼 있다. 1953년 근로기준법과 노동쟁의조정법 제정 때의 노동자들이 아니다. 그런데도 온갖 노동관련법들이 노조 측 입장을 주로 받아들임으로써 ‘기울어진 운동장’이 된 것이다. 이런 이분법적 시각이 시장생태계를 왜곡시키고, 다수의 노동자에게 좌절을 안기는 괴물을 키워온 실상을 직시해야 한다. 조선업종의 위기는 한국 제조업의 위기이고 이는 한국 산업의 위기다. 더 이상 노동개혁을 미룰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