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은주 선생님과 함께하는 한국문학 산책
쓸 방을 못 쓰고 사글세를 논 것은 돈이 아쉬웠던 까닭이었다. 두 영감 마누라가 산다고 호젓해서 동무로 모은 것도 아니다. 그런데 팔자가 사나운지 모두 우거지상, 노랑퉁이, 말괄량이, 이런 몹쓸 것들뿐이다. 이 망할 것들이 방세를 내는 셈도 아니요, 그렇다고 아주 안 내는 것도 아니다. 한 달 치를 비록 석 달에 별러내는 한이 있더라도 역 내는 건 내는 거였다.
사직골 꼭대기 집에서
사직골 꼭대기 깨웃한 초가집 주인마누라는 오늘도 골이 난다. 사글세를 못 받아서다.
세를 준 방은 세 개다. 첫 번째 방에는 대낮에도 이불을 뒤쓰고 잠을 자는 젊은 녀석이 있다. 제복공장 직공인 과부 누나에게 얹혀살며 방세 독촉을 할 때마다 묵묵부답이다가 돈은 우리 누님이 쓰는데요 누님 나오거든 말씀하십시오, 할 뿐이다. 두 번째 방에는 뒷간에 피똥을 싸 대는 부족증 환자 영감과 버스 걸 노릇으로 밥을 버는 딸이 살고 있다. 애초 방을 얻을 때 병을 숨긴 게 괘씸하기도 하거니와 영감의 광대가 불거진 노란 낯짝을 볼 때마다 송장 칠까 애간장이 졸아든다. 세 번째 방에는 카페 여급 아키코와 영애가 산다. 영애는 심술은 낼망정 뭐라 물으면 대답이나 하건만 아키코는 입을 앙다물고 대꾸 한마디가 없다. 방세를 조르면 외려 성을 낸다. 누구 있구두 안 내요? 좀 편히 계셔요, 어련히 낼라구 그런 극성 첨 보겠네.
방세고 뭐고 이 인간들을 아무래도 쫓아내야지 싶은 주인마누라는 꾀를 내어 집안의 조카를 데려왔다. 우선은 제일 만만한 백수, 방구석에서 맨날 글을 쓰는 걸 보고 아키코가 지어 준 별명대로라면 톨스토이를 쫓아내기로 한다. 주인마누라의 지시를 받은 조카는 톨스토이의 방에서 세간을 들고 나온다. 톨스토이가 멀건히 보기만 하는데 문틈으로 보던 아키코가 뛰쳐나온다. 아니 여보슈 남의 세간을 그래 맘대로 내놓는 법이 있소? 앙칼지게 조카를 나무라며 문을 막고 서자 분이 뻗친 구렁이(주인마누라)가 아키코의 팔을 잡아당긴다. 이 꼴이 아니꼬운 영애가 구렁이의 그 팔을 잡아채자 체격에서 밀린 구렁이가 제풀에 넘어진다. 이를 본 조카가 영애의 뺨을 쩔꺽 때리고 이제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된다. 아키코는 조카의 혁대를 낚아채고 영애는 구렁이에게 숯바구니를 던져 버린다. 어느 틈인지 노랑통이 영감까지 뛰쳐나와 사방에 소리를 지르며 그동안 쪼여 지내던 분풀이를 한다. 어디서 힘이 났는지 지팡이로 조카의 복장을 내지르고 귓바퀴를 내려갈긴다. 공격당한 조카가 넘어지자 아키코는 그 어깻죽지를 물고 늘어지고 영애는 뒤통수로 주먹을 암팡지게 날린다. 미닫이는 설주가 부러지고 뒤주 위 대접은 깨지고 조카는 죽게 생겼고 이러다가 방은커녕 사람 잡겠다 싶어 겁이 난 구렁이는 헐레벌떡 순사에게 신고한다.
세입자와 집주인의 한바탕 싸움
김유정은 ‘봄봄’과 ‘동백꽃’으로 우리에게 익숙한 작가다. 두 작품은 산골 마을을 배경으로 사춘기에 접어든 시골 소년·소녀의 풋사랑을 희극적인 필치로 그려내어 지금도 널리 사랑받는다. 그러나 두 작품 모두 순진하고 풋풋한 사랑 이야기로만 읽히지는 않는다. ‘동백꽃’ 속 마름의 딸과 소작농의 아들 간에는 이성적 긴장뿐 아니라 계층 간 긴장이 존재하며 이는 둘의 관계 형성에 큰 영향을 미친다. ‘봄봄’의 주인공 역시 갑순이의 키가 크면 사위로 맞겠노라며 소경도 주지 않고 자신을 부려먹는 갑순이 아버지에게 울분을 느끼고 있다. 주인공과 갑순이의 애정이라는 모티프를 걷어내고 나면 사실 노동력 착취의 보고서라 해도 좋을 내용이 차근차근 기록되어 있다. 해학성이 워낙 압도적이어서 표면에 잘 드러나지 않을 뿐 순박한 소년과 깜찍한 소녀의 사랑 이야기 이면에는 계층 간 갈등이 엄연히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 삶의 여실한 현장성은 김유정 작품 세계의 큰 축이다. 그의 다른 작품인 ‘산골 나그네’ ‘노다지’ ‘소낙비’ ‘만무방’ 등은 당대 민중의 척박한 삶을 극히 사실적으로 형상화하며 그 참상을 고발하고 있다.
‘따라지’는 1935년 조선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이다. 이 작품에는 그의 문학의 큰 축인 해학성과 삶의 현장성이 함께 직조되어 있다. 사직동 초가집 마당에서 펼쳐진 주인집 여자와 조카 대 세입자들의 싸움판은 유머 코드 가득한 상황극을 보는 듯하다. ‘전투’는 치열하지만 인물들은 지질하고 그 행동은 우스꽝스럽다. 작가의 능청스러운 묘사와 천연덕스러운 서술 탓에 우리는 그들의 삶을 잠시 잊고 웃을 수 있다.
그러나 한 발짝 떨어져서 보면 이 따라지들의 인생은 전혀 희극적이지 않다. 따라지는 보잘것없거나 하찮은 처지에 놓인 사람을 뜻한다. 우선 톨스토이, 누나에게 얹혀살면서 갖은 구박을 당하고 대낮에도 이부자리 보전을 하는 그는 전형적인 식민지 룸펜이다. 그런 톨스토이에게 연정을 품은 아키코는 술집 여급이다. 이는 곧 식민지 빈민의 딸이라는 뜻이다. 심지어 영애는 아버지가 팔아먹은 딸이다. 노랑통이 부녀를 한번 보자. 방을 얻지 못할까봐 병을 속이고 들통 난 뒤에도 한결같이 감기라고 우기는 기만은 살아남기 위한 고투이다. 고투임에도 영웅적이지 않고 투쟁임에도 장렬하지 않은 것은 그 잔 싸움들에 묻은 땟국물 때문이다. 노름판에서 개평을 놓고 물고 뜯는 싸움이 장렬할 수 있겠는가. 주인 여자가 순사를 데려왔을 때 그들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시치미를 뗀다. 자신들의 생존 투쟁을 진작에 구경한 활동영화마냥 흘려보내고 딴청을 피운다. 승자도 패자도 따로 없는 꾀죄죄한 싸움 같은 거 없었던 셈 치는 편이 낫다. 정색하고 과실을 따지느니 우스꽝스러운 해프닝으로 넘기는 편이 옳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김유정의 해학은 그 자체가 하나의 세계관이다. 해학과 유머가 행복한 자의 것이라는 생각은 피상적 단견이다. 일찍이 마크 트웨인이 설파했듯 유머는 슬픔에서 나온다.
손은주 < 서울사대부고 교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