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칼럼] 비극의 시작은 기업들 파산이었다

입력 2018-08-27 17:13
김현석 뉴욕 특파원


[ 김현석 기자 ] 미국 앨라배마주(州)에 버밍햄이란 도시가 있다. 2012년 이 도시가 한국에서 잠깐 유명해졌던 적이 있다. 공중파 방송 한 곳에서 자본주의 실패 사례로 이 도시에 대한 다큐멘터리 ‘최후의 제국’을 제작해 방영하면서다.

다큐멘터리에 따르면 버밍햄시는 재정 수입이 줄자 수도와 전기, 가스 등 필수 공공재 서비스를 민영화했다. 이 때문에 수도료, 전기료 등이 한 달 1000달러에 달할 정도로 가격이 폭등해 시민들이 고통받고 있다는 게 핵심이었다. 이 다큐는 국내 시민단체에 의료 민영화 등을 반대하는 논리를 제공했다. 지금도 포털에 ‘버밍햄’ ‘최후의 제국’을 키워드로 검색하면 민영화 반대 뉴스 등을 볼 수 있다.

버밍햄 파탄에 대한 오해

기자는 2014~2015년 버밍햄에 서너 차례 갔다. 앨라배마주립대에서 연수과정을 밟고 있을 때였다. 다큐에서 본 대로 도시는 을씨년스러웠다. 도심은 텅 비었고 쓰레기가 나뒹굴었다.

버밍햄은 1900년대 중반만 해도 미국 남부에서 손꼽히는 부자 도시였다. 그런데 왜 쇠락했을까. 알아보니 다큐의 내용은 맞았지만 분석은 틀렸다. 비극의 시작은 민영화가 아니었다. 도시를 떠받치던 기업들의 몰락이었다.

애팔래치아산맥 끝자락의 버밍햄에선 철광석과 석탄이 함께 채굴됐다. 임금이 싼 흑인 노동자도 많았다. US스틸, CMC스틸 등 철강회사들은 버밍햄에 제철소를 지었고 맥웨인, 아메리카캐스트아이언파이브컴퍼니(ACIPCO) 등 철강 관련 기업들도 줄줄이 설립됐다.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반까지 급성장하던 버밍햄은 ‘남부의 피츠버그’ ‘매직시티’로 불렸다.

암운은 1970년대 드리우기 시작했다. 자그마한 미국 철강회사들이 기술 개발이나 재투자 대신 사업다각화에 힘을 쏟는 사이 일본 신닛테쓰스미킨(新日鐵住金)은 대형 고로와 연속주조법 등 혁신 기술을 개발해 값싸고 질 좋은 철강재를 쏟아냈다. 한국 포스코도 급부상했다. 미국 철강사들은 적자에 내몰렸고 많은 인력을 해고했다. 버티던 철강회사들이 줄줄이 파산한 게 2000년대 초다. 실업자가 넘치자 도시 재정은 말라갔다. 버틸 수 없게 된 버밍햄은 필수 유틸리티 서비스마저 팔아야 했다.

포항·광양, 위험해질 수도

최근 버밍햄시에선 반전이 이뤄지고 있다. 버밍햄 남부 배세머의 샤넌 석탄 광산은 버락 오바마 전임 행정부의 친환경 에너지 정책을 폐기한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 정책에 힘입어 다시 채굴을 시작했다. 몇몇 제철소도 수입철강에 대한 관세 부과와 쿼터제 도입으로 미국 내 철강값이 급등하고 외국산 진입이 막히자 증산 및 재투자에 나섰다. 트럼프 대통령의 친기업 정책이 죽어가던 미 철강산업과 도시에 활력을 불어넣고 있는 것이다.

한국 철강업계 관계자는 “미국이 철강 재투자를 본격화하면 한국보다 몇 세대 앞선 최첨단 설비를 갖출 수 있어 포항과 광양이 위험해질 수도 있다”고 했다. 최근 완공된 오스트리아의 푀스트알피네 철강공장은 1960년대 1000여 명이 생산하던 강선 50만t을 현재 14명이 만들고 있다. “관세장벽으로 몇 년간 외국산을 막아놓은 뒤 첨단 설비 투자를 앞세워 산업 경쟁력을 확보한다”는 게 트럼프 행정부의 전략이라고 한다.

이렇게 되면 포항과 광양의 오래된 용광로는 점점 식어갈 수도 있다. 게다가 한국 정부는 기업보다는 저소득층 중심의 소득주도성장에 집중하고 있다. 몇 년 뒤의 버밍햄은 더 이상 쇠락하던 버밍햄이 아닐 수 있다.

realis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