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관의 ‘예’는 ‘아마도’를 의미하고, ‘아마도’는 ‘아니요’를 의미한다. ‘아니요’라고 하는 사람은 외교관일 리 없다.” 외교가에서 자주 회자되는 경구다. 한 무도회에서 비스마르크의 파트너가 외교관의 말은 믿을 수 없다며 한 말이다. 반면 군인이 ‘예’라고 할 때는 ‘예’를 의미하며 ‘아니요’라고 할 때는 ‘아니요’를 의미한다. 그가 ‘아마도’라고 한다면 군인일 리 없다. 이런 차이는 군인과 외교관의 존재 이유가 다름에서 비롯된다. 전쟁에서 승리해야만 하는 군인에게는 승패만이 있을 뿐이다. 외교관은 입장 차이를 극복하기 위해 상대편과 공동 목표를 설정하고 함께 노력해가는 사람이다. 외교관이 가급적 완곡하면서도 정중한 언어를 사용하는 이유다. 이런 이유에서 ‘외교란 가장 더러운 일을 가장 멋진 방법으로 말하거나 행하는 것’으로 정의되기도 한다.
점잖게 말하되 때론 설전도 불사
외교 현장에서 외교관은 절제된 언어를 구사한다. 회담 후에 “솔직하고 격의 없는 의견 교환이 있었다”고 한다면 의견 차이로 회담이 원만하게 진행되지 못했음을 시사한다. “일부 현안에 대해 합의를 봤다”고 한다면 상당수 현안에 이견이 존재함을 의미한다. “충분히 의견을 교환했다”는 표현은 어떤 합의도 이루지 못했다는 뜻이다. 상대방의 입장을 ‘이해’ 또는 ‘존중’한다는 말은 찬성하지 않는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말이다. ‘상호 존중’을 강조한다면 내정 간섭을 하지 말라는 것을 뜻한다. 심지어 “의견을 달리하다(disagree)”라고 하지 않고 “서로의 의견 차이를 인정한다(agree to disagree)”고 표현한다.
2001년 4월1일 중국 전투기와 충돌한 미군 정찰기가 중국의 하이난다오(海南島)에 ‘무단으로’ 착륙한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취임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은 대(對)중국 강경 정책을 표방하고 있었다. 중국에는 영토주권 침해 문제였다. 양측은 기싸움을 벌였다. 중국은 미국의 ‘사과’를 받아야 한다며 강경한 태도를 보였고 미국은 ‘유감’ 표명은 가능하나 ‘사과’는 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양국 외교관들은 오묘한 해법을 찾아냈다. 합의문을 영어로만 작성하되(영어 합의문에는 ‘유감’이라는 표현만 사용) 합의문의 중국어본은 중국 정부가 알아서 발표하도록 했다(중국어본에는 두 번이나 사과했다는 내용 포함). 또 정찰기 처리와 관련, 중국 정부의 주장대로 정찰기를 해체하되 해체된 부품은 미국이 가져가는 것으로 합의했다. 아슬아슬한 곡예를 통해 갈등을 봉합하고 분쟁을 예방한 것이다.
외교관이라고 해서 항상 고상하고 점잖은 말만 하는 것은 아니다. 상대방과 언쟁을 하다 보면 자칫 감정이 격해져 상대편을 비판하거나 거친 말을 내뱉기도 한다. 1965년 4월 초 미국 필라델피아의 템플대 강연에서 레스터 피어슨 캐나다 총리는 미국의 통킹만 폭격과 북베트남 침공을 비난했다. 이에 분노한 린든 존슨 미국 대통령은 피어슨 총리에게 “우리집 거실의 카펫에 오줌 싸지 마라”고 고함쳤다.
특히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거친 설전이 오가는 외교무대다. 2012년 12월15일 안전보장이사회 회의에서는 북한의 로켓 발사에 대한 규탄 수준을 둘러싸고 수전 라이스 미국 대사와 리바오둥 중국 대사 간에 험악한 설전이 벌어졌다. 라이스 대사가 “웃기는 말을 한다(That’s ridiculous)”고 하자 리 대사가 “말조심하라(You better watch your language)”고 맞받으면서 회의장 분위기는 일촉즉발 상태로 변했다.
세 치 혀로 ‘강동 6주’를 얻기도 하고 전쟁이 발생하기도 한다. 그만큼 외교관의 언어는 중요하다. 그러나 외교관도 크고 작은 실수를 한다. 외교관의 실수는 국가 이익에 직결된다는 점에서 파장이 크다. 폴 키팅 호주 총리는 1993년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회의에 불참한 마하티르 모하맛 말레이시아 총리를 “고집쟁이”라고 했다가 사과해야만 했다. 데이비드 캐머런 영국 총리는 2016년 런던에서 열린 반부패 정상회의를 앞두고 나이지리아와 아프가니스탄을 “환상적으로 부패된 나라”라고 했다가 문제가 되자 “부패와 열심히 싸우고 있는 나라”로 황급히 정정했다.
협상하려면 잘 듣는 것도 중요
외교관은 말을 잘해야 하지만 잘 듣는 것도 중요하다. 토크쇼의 제왕으로 불린 래리 킹은 말을 잘하는 첫 번째 법칙으로 ‘잘 듣기’를 꼽았다. 상대방의 말을 주의 깊게 듣고 공감할 때 협상을 성공적으로 이끌 수 있다.
윌리엄 글래드스턴과 벤저민 디즈레일리는 19세기 영국의 총리를 수차례 지낸 정치인이다. 한 젊은 부인이 어느 날 저녁에는 글래드스턴이 주최한 만찬에, 다음날 저녁에는 디즈레일리가 주최한 만찬에 초대받아 참석했다. 이 두 정치인에 대한 질문에 그는 답변했다. “글래드스턴 씨 옆에서 식사한 뒤 나는 그가 영국에서 가장 총명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됐다. 그러나 디즈레일리 씨 옆에서 식사한 뒤 나는 내가 영국에서 가장 총명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됐다.” 그는 다음 총선에서 누구를 찍었을까?
박희권 < 글로벌리스트·한국외국어대 석좌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