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녀 < 국립창극단 예술감독·중앙대 교수 sung-nyo@hanmail.net >
연극의 거리이자 젊음의 거리인 대학로에 푸르른 원로들의 잔치가 열리고 있다. 팔순에 가깝거나 팔순을 넘기신 연극인들이 꾸미는 연극제다. 평생 연극 한길만 걸어오신 원로 연극인들을 기억하고 존중하고자 만든 연극제다. 올해로 3회째다. 긴 세월 동안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끈기와 뚝심으로 지켜온 작품 중 연극사에 한 획을 그은 명작들과 기억 속에 남아 있던 명연기를 다시 만날 수 있는 뜻깊고 반가운 무대다. 열일 제쳐놓고 극장으로 달려간 이유였다.
극장 로비엔 나이 지긋한 관객이 많았다. 긴 세월을 함께한 팬들도 원로 관객이 돼 객석을 지켜준다는 생각에 고마워 절이라도 하고 싶었다.
자리에 앉아 막이 오르길 기다리는 동안 만감이 교차했다. 무대에서 평생 해 온 작업들이라고 해도 배우로서 영예를 얻은 대표작이라 대사 분량도 많을 테고 두 시간 넘는 대작의 에너지를 감당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기대만큼이나 컸다.
갑자기 뒤에 앉은 관객이 두런두런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노부부와 딸로 보이는 가족인데, 그들 중 남편이 프로그램을 보며 아는 척을 한다. “이게 말이야 화려해 보여도 평생 굶기 딱 좋은 직업이야. 마누라를 잘 만나야 살 수 있는 직업이지.”
픽 웃음이 나왔다. 그리고 이내 가슴이 서늘해졌다. 연극인들이 늘 자탄하듯 농담으로 하는 말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 곧 무대에서 혼신을 바칠 배우에 대한 시각으로는 너무 잔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배우를 천직으로 생각하고 배고픔보다는 무대를 사랑하며 연극을 통해 인생의 희로애락을 절절히 표현하고자 헌신한 연극인의 순수한 행로들이 생각나 짠해진다.
막이 올랐다. 청년 못지않은 열정이 나이를 무색하게 했다. 그 많은 대사들이 물 흐르듯 이어져 나왔다. 오랜 시간 몸속에 고여 체화한 연기들이 관객을 향해 묵직하게 뿜어져 나왔다. 전성기에 봤던 연기가 붉은 불꽃이었다면 삶을 껴안고 관조하듯 보이는 연기는 새파란 불꽃같이 맑았다. 무엇보다도 무대에 서 있다는 자체만으로 세상을 다 얻은 것처럼 행복해하는 모습이 감동으로 몰려왔다.
마지막 무대라고 생각하며 모든 힘을 다 쏟는 원로들의 늘푸른 연극제는 연극인에게 초심을 일깨워주는 견인차며 세대를 넘어 이어져야 할 가치다.
이게 바로 연극인이 가는 길이다. 평생 무대에 서왔던 나의 길이기도 하다. 이 길은 세상에서 버틸 수 있던 정신적인 승리이기도 하고 가난에 무릎 꿇지 않은 연극인들의 자존심이기도 하다. 늘푸른 연극제의 모든 작품에 관객으로 자리하는 것으로 감사와 존경의 마음을 대신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