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O 탐구] 이재환 톱텍 회장 "아이디어 떠오를 때까지 미친듯이 연구한 결실"

입력 2018-08-21 17:28
공고 나와 창업…R&D 집념이 '1조 벤처' 밑거름

가난으로 고교진학 꿈도 못 꿔
국비지원으로 공고 들어가
입대후 "창업으로 성공하자" 다짐
25살에 TV 자동화장비업체 설립

25년 함께한 '삼성의 파트너'
한화기계 통해 삼성에 납품하다
담당자 눈에 띄어 직접 거래
"실력으로만 승부했더니 통해"

철저한 성과주의 체계
'빡세게' 일 시키기로 유명하지만
실력 갖춘 엔지니어로 육성
"직원 100% 믿고 맡기니 성과 내"


[ 전설리 기자 ]
작년 6월 애플 구매 담당자가 삼성디스플레이 베트남 공장을 찾았다. 5개월 뒤 나올 신제품 아이폰Ⅹ에 쓸 OLED(유기발광다이오드) 생산 시설을 점검하기 위해서였다. 애플 담당자는 의심과 불안을 안고 돌아갔다. 기한 내에 설비를 구축해 생산을 시작하는 게 불가능할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공장 부지만 축구장 7개를 합쳐놓은 6만6000㎡에 달했다. 새 설비를 구축해야 하는 공장은 5층 규모였다. 석 달 뒤 다시 공장을 방문한 애플 담당자는 깜짝 놀랐다. “이게 어떻게 가능합니까?” 그에게서 나온 첫 마디였다.

이 공장에 생산장비를 구축한 업체는 삼성디스플레이 자동화장비 협력사 톱텍이다. 톱텍은 이 프로젝트를 완수하며 매출 1조원짜리 기업으로 거듭났다. 국내 자동화장비업계에서 매출 기준으로 에스에프에이(SFA)에 이어 2위, 세계에선 12위다. 이재환 톱텍 회장(51)은 “아이디어가 떠오를 때까지 미친 듯이 연구개발(R&D)에 몰입해 이뤄낸 결실”이라고 했다.

가난과 꿈

이 회장은 경북 봉화에서 태어났다. 집이 가난해 고교는 꿈도 못 꿨다. 고교는 첫째만의 특권이었다. 그는 둘째였다. 어느 날 부산기계공고의 학생모집 공고를 봤다. 학비가 전액 무료였다. 버스와 기차를 여러 번 갈아 타고 가서 시험을 봤다. 한 달 뒤 합격 통지서가 왔다. 공고 졸업 후 입대했다. 철책에서 보초를 서며 다짐했다. “창업해서 꼭 성공하리라.”

제대 후 1992년 브라운관(CRT) TV 자동화장비업체 톱텍을 설립했다. 장비를 제작해 한화기계를 통해 삼성전관에 납품했다. 공장에서 열심히 장비를 설치하고 있는 그를 눈여겨본 삼성전관 담당자가 와서 ‘얼마를 받느냐’고 물었다. 답을 들은 담당자는 깜짝 놀랐다. 삼성전관이 발주한 가격의 절반에도 미치지 않았던 것이다. 이 일을 계기로 삼성전관과 직접 거래를 텄다. 이후 PDP(플라즈마디스플레이패널) LCD(액정표시장치) OLED에 이르기까지 25년간 삼성 협력사로 일하고 있다. 경쟁은 치열했다. 삼성은 수십 개 장비업체에 동시에 발주해 짧은 기간에 설비 구축을 끝낸다. 기술산업은 한 번 투자 시기를 놓치면 순식간에 경쟁에서 뒤처지기 때문이다. 이 회장은 “로비가 통하지 않는 삼성 협력사로 살아남기 위해 오직 실력으로 승부했다”며 “톱텍이 삼성과 함께 클 수 있었던 배경”이라고 말했다.

외환위기 때 가장 행복했던 이유

그는 한눈을 팔지 않았다. “기업이 돈을 벌면 기업 본연의 목적에 맞는 일에만 돈을 써야 한다”고 생각했다. 톱텍과 시너지를 낼 수 있는 사업만 했다. 성공한 비결 중 하나다. 톱텍은 한 번도 적자를 낸 적이 없다. 두 번의 금융위기도 거뜬히 넘겼다. 이 회장은 “촌놈이라 돈을 쓸 줄 몰랐다”며 “창업 초기 주머니에 어음 5억원어치를 넣고 다닌 적도 있다”고 했다. 현금으로 무엇을 할까 고민하다가 공장을 지었다. 1997년 말 외환위기가 터졌다. 달러와 엔화를 빌려 공장을 지은 경쟁사들이 부도를 맞거나 부도설에 시달렸다. 부품업체들은 현금만 받았다. 그는 “외환위기 때 가장 행복했다”며 “삼성으로선 부도 걱정 없이 일을 맡길 수 있고, 부품업체 입장에선 떼일 걱정 없이 부품을 팔아도 되는 몇 안 되는 업체가 톱텍이었다”고 했다.

톱텍을 키울 수 있었던 또 다른 경쟁력은 ‘기계에 대한 호기심과 욕심’이었다. 제작해보고 싶은 기계는 반드시 만들어내야 했다. 1994년 한 공장에서 자동차 팬벨트 생산기계를 봤다. ‘나도 만들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류하는 직원을 설득해 기계를 분해했다. 톱텍 공동 창업자인 방인복 사장과 반년간 연구에 매달린 끝에 똑같은 기계를 만들어냈다. 소식을 들은 팬벨트 공장 사장이 톱텍을 방문했다. 기계를 본 그는 그 자리에서 톱텍과 수억원의 납품 계약을 맺었다. 그는 “R&D는 마약과 같다”고 했다. 한번 도전해 개발하기 시작하면 반드시 해내야 한다는 집념이 생겨 끊기 힘든 마약과 같다는 것이다.

이 회장은 “혼자 해야겠다, 혼자 해냈다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는 “기업은 혼자 하는 게 아니라 함께하는 것”이라며 “톱텍 임직원을 100% 믿고 일을 맡긴다”고 강조했다. “일하고 있는 엔지니어에게 따져 묻지 않고, 무슨 일이 있어도 일이 끝날 때까지 기다려 결과가 잘못됐을 때에야 책임을 묻는다”는 것이다. 몰입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서다.

“기업은 함께하는 것”

일류대학 출신 인재가 중소기업에 취직하는 일은 드물다. 톱텍도 마찬가지다. 이 회장은 “사람의 아이디어와 잠재력은 시험지나 대학 명패로 평가할 수 없다”며 “일류대학 졸업생은 아니어도 일류로 키우면 된다”고 했다. 그는 “톱텍 엔지니어들의 실력은 최고”라고 강조했다. 그가 일류 인재를 키우는 방식은 스스로 발전할 수 있게 독려하는 것이다. 철저하게 실력과 성과 위주로 연봉을 책정하는 것도 동기를 부여하는 한 방법이다. 한국기술교육대(충남 천안시) 등 톱텍 인근 공대 교수들은 톱텍을 이렇게 소개한다. “톱텍은 한국에서 일을 가장 ‘빡세게’ 시킨다. 하지만 톱텍에서 2~3년을 견디면 어디서나 일할 수 있는 실력을 갖춘 엔지니어가 된다.”

이 회장은 지난해 1조원이 넘는 프로젝트를 마치고 돈보다 소중한 것을 깨달았다고 했다. 훌쩍 성장한 톱텍 엔지니어들의 실력이다. 프로젝트가 끝난 뒤 그는 설계팀에 황사마스크 생산 자동화 기계를 제작해 보라고 했다. 자회사 레몬이 개발한 나노섬유로 황사마스크를 제조하는 사업을 추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중국 황사마스크 생산기계가 분당 48개를 생산한다.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 분당 75개를 생산하는 기계를 제작하라”고 지시했다. 엔지니어들은 자신 없는 표정으로 사무실을 나갔다. 하지만 한 달 뒤 정확히 분당 75개를 생산하는 기계를 만들어냈다. 이 회장은 놀란 동시에 후회했다고 했다. 분당 100개 생산하는 기계를 만들라고 지시하지 않은 것에 대한 후회였다.

자동화장비업계의 전망은 밝다. 이 회장은 “4차 산업혁명이 활발해질 20년간 자동화장비 기술 발달 속도는 과거 20년 발달 속도의 두 배에 이를 것”으로 내다봤다. 그는 “인공지능(AI) 기술이 아무리 발달해도 자동화장비 기술이 있어야 힘을 발휘할 수 있다”며 “톱텍을 최고 자동화장비 기업으로 키우고 싶다”고 말했다.

나노섬유 개발도 동문과 함께… 이재환 회장의 '부산기계공고 네트워크'

이재환 톱텍 회장에게는 부산기계공고에서 만나 지금까지 함께해온 동업자가 있다. 고교 동기인 방인복 사장(51)이다. 이 회장과 방 사장은 1992년 33㎡ 남짓한 사무실에서 자동화장비업체 톱텍을 설립했다. 당시 농담처럼 “1억원 이상 매출을 올리는 기업을 만들어 보자”고 했는데 ‘1조원짜리 기업’으로 키웠다.

이 회장과 방 사장은 서로를 ‘좋은 파트너’라고 말한다. 추진력이 강하고 적극적인 이 회장은 대외 활동과 경영을 맡았다. 기계를 만지고 설계하는 것을 좋아하는 조용한 성격의 방 사장은 엔지니어링을 담당했다. 서로의 강점을 살려 경쟁력을 강화한 것이다.

방 사장은 2016년 1월 고용노동부와 한국산업인력공단이 선정하는 ‘이달의 기능한국인’으로 뽑혔다. 그는 대부분 독일에서 수입하던 자동차 팬벨트 국산화에 성공하는 등 각종 혁신기술을 개발한 점을 인정받아 상을 받았다. 톱텍은 2015년 삼성전자와 기술 제휴해 휴대폰 래미네이션(물체에 덧씌워 표면을 보호하고 강도와 안정성을 높이는 얇은 층) 생산장비 개발에도 성공했다. 래미네이션 장비 개발로 투입 부품이 절반 이상 줄어 휴대폰 제조원가를 30%가량 절감할 수 있었다.

이 회장의 또 다른 부산기계공고 동문으로 김익수 일본 신슈대 섬유학부 교수(51)가 있다. 톱텍은 김 교수와 나노섬유 대량 생산에 성공, 자회사 레몬을 통해 나노섬유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이 회장은 2007년 김 교수를 만나기 위해 신슈대를 찾았다가 나노섬유를 처음 접했다. 김 교수는 “나노섬유가 꿈의 섬유로 불리지만 대량 생산을 못 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 회장은 김 교수가 기술을 개발할 수 있도록 지원하기로 했다. 김 교수와 톱텍은 연구 끝에 나노섬유 대량 생산 장비 개발에 성공했다. 레몬은 국내 주요 생리대업체와 조만간 나노섬유를 적용한 생리대 판매에 나설 예정이다. 이 회장은 “미국 화학업체 듀폰도 도전했다가 실패한 프로젝트”라며 “미세먼지 마스크, 아웃도어 의류, 메디컬 관련 제품 등 활용 분야가 무궁무진하다”고 했다.

■이재환 회장 프로필

△1967년 경북 봉화 출생
△1986년 부산기계공업고 졸업
△1992년 톱텍 설립
△1996년 동서대 졸업
△2002년 부산대 경영대학원 수료
△2009년 모범중소기업인 대통령 표창
△2010년 지식경제부장관상 수상
△2011년 벤처기업 국무총리 표창
△2016년 일자리창출 유공 고용노동부 장관 표창
△2018년 대한민국코스닥대상 최우수경영상 수상

전설리 기자 slju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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