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 칼럼] 효창공원의 삼의사(三義士)

입력 2018-08-17 18:46
고두현 논설위원


서울 용산의 효창공원(孝昌公園)은 원래 소나무가 우거진 왕실묘역이었다. 정조의 첫아들 문효(文孝)세자 무덤이 있어 ‘효창원(孝昌園)’으로 불렸다. 이곳에 1894년 청일전쟁 때 일본군이 주둔했다. 일제강점기에는 독립군 토벌작전 지휘부가 있었다. 일제는 문효세자 묘를 서오릉으로 옮기고 이곳을 공원으로 바꿨다.

광복 이듬해인 1946년 이곳에서 국민장(國民葬)이 치러졌다. 독립운동가 윤봉길·이봉창·백정기 삼의사(三義士)의 유골을 봉안하는 행사였다. 1932~1934년 일본 감옥에서 순국한 세 의사의 유해를 모셔오면서 장지를 여기로 낙점한 사람은 백범 김구였다. 세 명 모두 백범의 지휘로 거사에 나선 인물이다.

윤봉길 의사는 상하이 훙커우공원에서 도시락 폭탄으로 일본군 장성들을 응징했다. 용산 출신의 이봉창 의사는 일본인 양자로 입양됐다가 한인애국단원이 돼 도쿄의 일왕에게 폭탄을 던졌다. 백정기 의사는 상하이에서 주중 일본공사를 습격하다 체포돼 옥중에서 순국했다.

이들에 이어 1948년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 이동녕, 군무부장 조성환, 비서장 차리석 선생의 유골이 묻혔다. 이듬해 암살된 백범의 유해도 이곳에 안장됐다. 국립현충원이 생기기 전인 당시로서는 이곳에 안장하는 것이 최고의 예우였다. 일제가 조성한 공원에 항일독립투사들을 모신다는 점에서 ‘극일(克日)’의 의미도 컸다.

삼의사 묘 옆에는 비석 없는 가묘(假墓)가 하나 있다. 아직 유해를 찾지 못한 안중근 의사의 허묘다. 그 앞에 무궁화 다섯 그루도 서 있다. ‘김구 무궁화’는 잠시 승려 생활을 한 마곡사에서 가져와 심었다. ‘안중근 무궁화’는 그가 다니던 명동성당, ‘이봉창 무궁화’는 모교가 있던 숙명여대 교정, ‘윤봉길 무궁화’는 예산군 생가, ‘백정기 무궁화’는 정읍시에서 왔다.

국가보훈처가 효창공원을 ‘독립운동기념공원’으로 바꿀 계획이라고 한다. 용산구 소관이던 것을 국가가 관리하고 옆에 딸린 효창운동장을 없앨 모양이다. 그러나 2005년 노무현 정부가 추진했다가 실패한 사례를 교훈 삼아 여론을 폭넓게 수렴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용시간이 제한되는 등 접근성과 활용성이 이전과 달라지기 때문이다.

지금의 효창공원 분위기는 경건하면서도 평화롭다. 아이들은 공을 차며 뛰놀고, 어른들은 산책하며 휴식을 즐긴다. 이들 모두 이곳에 안장된 선열들의 후예다. 이들을 지켜보는 무궁화꽃의 표정도 환하다.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