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접 소통' 출발 좋았지만… '대통령 만능주의' 빠질 우려

입력 2018-08-16 17:35
청와대 국민청원 1년…국민 1239만명 동참·靑 46건 답변

'이윤택 진상규명' 사건처럼 약자 권리 보호위한 창구 역할
난민법 개정·개도살 금지 등 '판도라의 상자' 열기도

대부분 입법 필요한 청원
장차관들 답변도 '두루뭉술'

매일 730여건 쏟아지며
사회적 갈등 유발 지적도


[ 박재원 기자 ]
청와대 국민청원이 17일로 1년을 맞았다. 지난 1년간 청와대를 향해 쏟아진 청원만 총 26만5000건에 달한다. 난민법 개정, 개 도살 금지 등 그동안 ‘판도라의 상자’에 갇혀 있던 민감한 논쟁들을 공론의 광장으로 이끌어낸 사례가 적지 않다. 국민과의 직접 소통을 위한 ‘친절한 청와대’ 프로젝트가 보인 한계 역시 뚜렷하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대한민국 정치인들을 죽여달라’는 유의 극단적인 청원들이 주류를 이루면서 오히려 사회 갈등을 부추기는 것 아니냐는 비판이다.

총 국민청원 26만 건 돌파

‘국민이 물으면 청와대가 답한다’는 취지로 시작된 청와대 국민청원은 미국 백악관이 시행 중인 ‘위 더 피플(We the People)’을 본떠 만든 제도다.

이전 정부들도 자유게시판을 운영하면서 민심을 읽으려 했다. 문재인 정부가 운영 중인 청와대 국민청원은 청와대와 관련 부처가 청원에 직접 답변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국민청원에 온 국민의 관심이 쏠리면서 청와대는 답변자 면면을 초호화로 구성했다. 박상기 법무부 장관, 김현미 국토교통부 장관, 박능후 보건복지부 장관,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 최종구 금융위원장, 홍남기 국무조정실장 등 총 9명의 장차관급 인사가 답변자로 섭외됐다. 청와대에선 1년간 3명의 수석과 11명의 비서관이 ‘친절한 청와대’의 얼굴마담이 됐다.

제도 활성화라는 측면에서 보면 지난 1년간의 성과는 눈부실 정도다. 국민청원 수만 26만 건을 웃돈다. 매일 730건가량의 청원이 청와대에 쏟아진 셈이다. 지난 15일에만 816건의 청원이 등록됐다. ‘답변 없는 공허한 메아리’라는 비판을 받았던 이전 정부의 자유게시판과는 확연히 비교되는 대목이다.


부처 간 칸막이나 관료들의 탁상행정 탓에 지지부진하던 사안들이 국민청원을 통해 해결된 사례도 꽤 많다. 난민법 개정이 대표적인 사례다. 예멘 난민들이 제주도로 대거 유입되면서 난민법을 둘러싼 청원에 71만 명이 참여해 법무부를 움직인 것이다. 지난 1일 박상기 장관은 난민법을 폐지하기는 어렵지만 범죄자 등 ‘옥석’을 가리기 위한 법 개정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약자들의 권리 보호’라는 긍정적인 효과를 내기도 했다. ‘연극계 미투’로 번진 ‘이윤택 진상 규명(20만8522명)’, 권력자에 대한 성접대 의혹을 불러일으킨 ‘고(故) 장자연 사건 진실 규명(23만5796명)’ 등의 국민청원은 수사에 힘을 싣거나 재조사가 이뤄지는 계기가 됐다. 이 밖에 ‘유기견 보호소 폐지를 막아달라(22만6252명)’는 청원 이후 보호소 폐지 결정이 철회됐다. ‘개를 가축에서 제외해달라(21만4634명)’는 청원에는 청와대에서 “규정 정비를 검토하겠다”고 답했다.

긍정과 부정 효과, 팽팽한 1년

청와대 국민청원의 부정적인 면을 지적하는 목소리도 만만치 않다. 청원과 무고의 경계를 넘나드는 글들로 도배되는 일이 잦아 청와대도 골머리를 앓고 있다. 평창동계올림픽 당시 스피드스케이팅 국가대표 선수들 사이에서 분란이 일자 이에 분노한 일부 시민들이 ‘김보름, 박지우 선수 자격을 박탈하라’는 청원(61만4127명)을 올리기도 했다.

최근 ‘더 내고 덜 받는 구조’를 골자로 한 국민연금 개정과 관련해선 ‘국민연금공단 임직원을 모두 처벌하라’는 청원이 등장했다.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은 페미니스트와 이들을 혐오하는 사람들의 격전장이기도 하다. 얼마 전엔 ‘범죄자 한국여성들, 공권력 투입해 탄압해야 한다’는 극단적인 글이 대거 올라왔다.

공론의 광장에서 논의할 만한 안건을 결정하는 방식에 대해서도 의구심이 커지고 있다. 현재는 20만 명 이상이 청원을 올리면 청와대가 답변하도록 돼 있다. 많은 이들이 관심을 갖고 있는 문제를 중시하겠다는 것인데, 일각에선 ‘조작’ 가능성을 제기하기도 한다. 지난 15일 26만3307번째로 글을 올린 한 청원자는 “내가 한 번도 본 적도, 동의한 적도 없는 글들이 20만 청원으로 올라오는 게 신기할 뿐”이라며 “옛날처럼 그냥 청와대자유게시판으로 명칭을 바꾸는 게 낫다”고 꼬집었다.

청와대는 폭력성·허위사실·명예훼손 등의 소지가 있는 내용을 삭제하고 있다. 명확하지 않은 삭제 규정 탓에 ‘일방 삭제’ 논란을 키우기도 했다.

전문가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청와대의 부담이 가중될 수밖에 없다고 지적하고 있다. ‘대통령이 모든 것에 답을 할 수 있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킨다는 것이다. 청와대 ‘1호 답변’인 소년법 개정 건만 해도 당시 답변을 맡았던 조국 청와대 민정수석은 “범죄를 저지른 청소년들을 엄벌하라는 국민의 요청은 정당한 측면이 있다”면서도 “한 방에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착오”라고 했다. 청와대가 모든 걸 해결할 수 없다는 점을 우회적으로 드러낸 답변이었다.

김형준 명지대 인문교양학부 교수는 “인수위원회 없이 출범한 문재인 정부가 정권 초기 국민청원을 통해 의견수렴에 나선 것은 긍정적이지만 청와대에서 해결할 수 없는 청원이 연일 쌓이면서 자칫 ‘청와대 만능주의’를 자인하는 셈이 됐다”고 지적했다. 이에 대해 정혜승 청와대 디지털소통센터장은 “청와대 국민청원에 대한 긍정과 부정 평가가 엇갈린다는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라며 “이를 해소하기 위해 수시로 개선작업을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박재원 기자 wonderfu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