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 칼럼] 연해주의 한국 농장

입력 2018-08-13 19:24
고두현 논설위원


발해유적을 찾아 러시아 연해주(沿海州)를 탐사하던 기억이 엊그제처럼 생생하다. 현장에서 본 평원은 끝이 없을 정도로 광활했다. 넓이가 남한의 1.6배인 16만5900㎢에 이르고 해안선이 1350㎞나 된다. 겨울에도 얼지 않는 부동항(不凍港) 블라디보스토크가 동해에 접해 있다.

옛날 고구려와 발해 땅이었던 이곳은 명나라와 청나라의 지배를 받다가 1860년 베이징 조약으로 러시아 영토가 됐다. 한인들이 본격적으로 이주한 것은 1863년부터다. 극심한 가뭄으로 기근이 들자 함경도 농민들이 두만강을 건넜다. 지금의 하산 지역에 터를 잡은 이들은 지신허(地新墟)라는 마을을 일궜다.

한인 인구는 1937년 17만2000여 명으로 늘어났다.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를 당하는 아픔도 겪었지만, 현재 5만여 명이 살고 있다. 일제 시절 독립운동의 근거지였다. 최초의 임시정부인 ‘대한광복군 정부’가 이곳에서 결성됐다. 안중근 의사 기념비와 이상설 유허비도 남아 있다.

우리 조상들은 이 척박한 동토(凍土)에서 벼농사를 짓는 데 성공했다. 중앙아시아로 쫓겨갔다가 돌아온 ‘까레이스키(고려인)’ 가족들도 호미와 삽으로 경작지를 늘려 나갔다. 2000년대부터는 한국 기업들이 대규모 농장을 설립하며 첨단 농업의 시대를 열기 시작했다.

현대중공업은 2003년 정주영 회장의 유지에 따라 현지 농장을 구입했다. 미하일로프카 지역에 있는 현대농장은 여의도 면적(295ha)의 23배에 이르는 6700ha(약 2000만 평) 규모다. 인근의 하롤농장은 이보다 큰 1만ha(3000만 평)다. 현대농장은 지난해 롯데상사가 인수했다. 롯데는 올해 콩·옥수수·귀리 3만850t을 생산해 700t을 국내로 들여왔다. 나머지는 중국 등으로 수출할 계획이다.

농식품 전문업체인 서울사료는 2008년 연해주에 설립한 농업법인을 통해 1만2000ha의 농장을 운영하고 있다. 올 상반기에만 1만t 규모의 옥수수를 들여왔다. 젖소 600여 마리를 키우며 원유(原乳)를 수출하기도 한다. 종교단체 소속의 아그로상생 농장 5곳과 남양 알로에 유니베라 농장도 해마다 새 씨앗을 뿌리고 있다.

포항 출신으로 북동그룹 농장을 경영하는 임하규 씨는 600여만 평의 농지에서 고랭지 채소를 키워 전량 일본 등에 수출하고 있다. 연해주 사람들은 한국 농장의 첨단 기계와 뛰어난 기술, 비닐하우스 농법에 찬사를 보내며 “투자를 더 늘려 달라”고 요청하고 있다.

지금도 밭을 갈면 옛 발해 시절의 기와조각이 출토된다는 연해주. 한때 우리 땅이었던 이곳이 총칼 대신 쟁기와 트랙터에 의해 옥토로 거듭나고 있다. 올해가 한인들의 연해주 정착 155주년이어서 감회가 더욱 새롭다.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