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일훈 칼럼] 이건희 50세 vs 이재용 50세

입력 2018-08-07 17:40
"삼성 총수는 무한책임 지는 자리
이재용, 강력한 톱다운 개혁으로
'20년 성장' 청사진 마련해야"

조일훈 편집국 부국장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앞날은 아슬아슬하다. 정부의 지배구조 개편 압박과 경영권 상실에 대한 두려움, 도무지 끝이 보이지 않는 사법적 불확실성이 먹구름처럼 짙게 드리워 있다. 수출-고용 1위 삼성그룹을 이끄는 경영자로서의 책임은 무한대다. 실수하면 언제든지 끌어내리겠다는 ‘저격수’들이 줄을 서 있다. 기댈 언덕도, 도망칠 곳도 없다.

이 부회장은 2014년 아버지(이건희 삼성 회장)의 갑작스런 와병 이후 감내하기 힘든 고초를 겪었다. 슈퍼맨이 아닌 이상에야 심신이 성할 리가 없다. 경쟁자들인 제프 베저스(아마존 CEO), 팀 쿡(애플 CEO), 래리 페이지(구글 알파벳 CEO), 마윈(알리바바 CEO)은 종횡무진 내달렸다. 삼성 특유의 혁신과 스피드가 힘을 잃은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이 부회장은 올해로 만 50세다. 이건희 회장이 45세에 삼성그룹 경영권을 물려받았으니 이 부회장의 나이가 적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충분한 준비가 됐느냐고 묻는다면 지난 4년의 공백과 시련이 아쉬울 수밖에 없다.

이건희 회장은 1993년 ‘신경영’이라는 이름의 대혁신을 단행했다. 전 세계 기업사에 유례가 없는 혁명적인 발상과 실천이었다. 그는 하루 최장 16시간, 연간으로 총 350시간에 이르는 ‘릴레이 강연’을 펼쳤다. “변해라, 바로 여러분 자신을 위해 변해라, 변하지 않으면 죽는다”는 것이었다. 지금이라도 강의를 돌려서 들어보면 ‘황제경영’이라는 비난을 할 수가 없다. 그는 누구보다 절박하고 격정적이고 애국적이었다. 1993년 2월 미국 로스앤젤레스(LA) 회의에서 나온 열변의 한 토막이다. “내 재산을 늘리기 위해 이렇게 떠드는 것이 아니다. 재산이 10배 더 늘어봐야 내게는 별 의미가 없다. 여러분이 잘되게, 회사가 잘되게, 나라가 잘되게, 여러분의 자손이 잘되게 하기 위해서다.…우리나라는 과학기술에 대한 몽매 때문에 역사의 낙오자로 오랫동안 수모를 받아왔다. 삼성이 주체적 기업의식, 주인의식, 민족의식을 갖지 않으면 안된다….” 그의 나이 51세 때였다.

삼성 같은 거대 기업을 이끌려면 적어도 한 세대를 대표할 수 있는 능력과 자질을 갖춰야 한다. 이 자리가 이재용 부회장에게 떨어졌다. 영광이기도 하지만 불운이기도 하다. 평생 무거운 책임과 부담을 짊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잘하는 것은 표가 나지 않는다. 사실, 잘해야 본전이다. 삼성을 세계 최고 기업으로 일군 이건희 회장조차 ‘재벌 2세’라는 딱지를 벗지 못하는 것이 한국의 야박한 인심이다. 세상 사람들은 ‘최고의 금수저’라고 부러워했지만 이 부회장은 바로 그 이유로 젊은 시절부터 손가락질을 받았고 감옥에까지 갔다. 혹여 삼성이 조금이라도 휘청거리는 날이 오면 그 모든 비난은 오직 한 사람을 향할 것이 명약관화하다.

이재용 부회장은 이제 자신만의 언어를 가질 때가 됐다. 개혁적 구상으로 가득한 경영 청사진을 준비해 삼성의 변화와 혁신을 이끌어야 한다. 내부부터 추슬러야 한다. 무엇보다 임직원들의 소속감, 일체감이 예전같지 않다. 사방에서 파도가 밀려드는데, 누구 하나 몸을 던지는 이가 없다는 탄식이 들려온다. 사업전선도 많이 흐트러져 있다. 당장 돈이 안되거나, 실패할 위험이 크거나, 인사에 불이익을 받을 일은 일단 피하고 보는 풍조가 자라나기 시작했다. 총수가 아니면 바로잡을 수 없는 병폐들이다. 자율경영 시대라고 말하면 안 된다. 강력한 톱다운이 없는 자율경영은 모래알이다. 인간이 그렇게 자율적인 존재도 아니다. 인재와 기술을 널리 구하고 거대 기업조직이 보유하고 있는 정보와 지식을 다시 모아야 한다. 이를 위해 그룹 조직도 재건할 필요가 있다.

이건희 회장은 5년을 숙성시킨 신경영 선언으로 20년 성장의 초석을 놓았다. 이 부회장도 새로운 20년을 향한 비전을 내놓아야 한다. 이것이 피할 수 없는 그의 숙명이다.

ji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