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희경 기자의 컬처 insight
자신이 뭘 좋아하는지 몰랐던
현대인에게 취향을 찾도록 제안
잃어버린 정체성 회복 유도
[ 김희경 기자 ]
30대 직장인 A씨는 요즘 퇴근 후 매일 집에서 붓을 든다. ‘유화 그리기 세트’에 들어가 있는 풍경화를 그린다. 원래 그림엔 관심이 없었다. 소질이 없어 보여 취미 활동으로도 그림을 그릴 생각은 하지 못했다. 그러다 우연히 스케치가 돼 있는 캔버스에 정해진 대로 색칠하기만 하면 된다는 얘기를 들었다. 1만~2만원대라 부담도 크지 않아 가볍게 시작했는데, 이젠 퇴근 뒤에도 주말에도 붓을 잡는 자신을 보고 놀란다고 한다. 그림이 조금씩 완성되는 걸 보면 스트레스가 줄어드는 것 같고 색다른 희열도 느낀다.
A씨는 미처 발견하지 못한 취향들을 더 찾아나설 생각이다. 이를 위해 ‘하비박스’란 업체에서 ‘취미키트’도 주문했다. 매달 3만8000원에 커피 핸드드립, 뜨개질, 공예 등을 재료, 설명서 등과 함께 넣어 배달해 준다. 뭐가 잘 맞을지 몰라 선뜻 배우기 어려웠는데 하나씩 경험해 보고 결정할 계획이다.
‘취미’를 넘어 ‘취향’ 재발견에 나선 사람들이 늘고 있다. 단순히 예전 즐겨 하던 것을 다시 해보는 수준에 머물지 않는다. 그동안 몰랐던, 자신 속에 잠재해 있는 선호를 발굴하기 시작했다. 주 52시간 근무제 영향도 있지만,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보려는 심리가 강하게 작용했다. 이런 수요들로 ‘취향산업’도 빠르게 진화하고 있다. 기존의 ‘취향 저격’에 그치지 않고 새롭게 ‘취향 제안’을 하는 방식이다.
취미와 취향은 다르다. 취미는 습관이지만, 취향은 자아다. 취미는 만들어지고, 취향은 발견하는 것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이 취미를 곧 취향이라고 여긴다. 친근하고 익숙하면 자신의 취향이라고 착각하기도 한다. 《취향의 탄생》의 저자 톰 밴더빌트는 음악을 예로 든다. 여러 사람에게 같은 곡을 들려주고 작곡가는 각각 다르게 알려줬다. 어떤 이에겐 바흐, 다른 이에겐 예를 들어, 북스테후드라고 한다. 같은 음악을 듣고도 바흐라고 들은 사람들의 선호도가 훨씬 높게 나타난다. 밴더빌트는 “많은 사람이 이젠 안정적인 취향을 지닌 이성적인 어른이 됐다고 생각하지만 꼭 그렇진 않다”며 “사람들은 미신을 믿듯이 자신의 취향을 믿기도 한다”고 말한다.
한국에선 이런 경향이 더욱 강하게 나타난다. 다양한 영역을 자연스럽게 경험하는 게 아니라 특정 내용을 주입식으로 접하기 때문이다. 취향을 무의식적으로 배제하기도 한다. 그저 즐기면 되는 음악, 미술 등에도 성과 중심의 평가가 이뤄진 영향이다. 다른 아이들에 비해 음악 성적이 낮으면 ‘내 취향이 아니구나’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취향을 잃어버린 채 성장한 ‘어른아이’들이 이제 서서히 자신에게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바쁜 일상에 치여 잊고 있었던 자신의 정체성을 찾고자 하는 욕구다.
취향산업은 이들을 공략하기 위해 다양한 형태로 발전하고 있다. 그림이든 요리든 도구를 일일이 다 사서 배우러 다닐 필요 없이, 처음부터 모든 걸 갖춰놓고 시작할 수 있도록 돕는다. 처음엔 원하는 사람들을 모아 하루 동안 결과물을 완성하는 ‘원데이 클래스’가 먼저 이런 형식을 도입했다. 최근엔 유화 그리기 세트처럼 집에서 편하게 즐길 수 있도록 작은 키트로 구성해 온라인·모바일에서 판매한다. 비용·시간 절약으로 부담없이 취향을 찾을 수 있도록 한다.
종류도 점점 세분화되고 있다. 가죽팔찌, 비누, 마카롱, 과자집 만들기 등 일상에서 소소하게 활용하거나 가볍게 먹을 수 있는 것들이 대표적이다. 거창한 작품을 만들도록 하는 게 아니라 즐겁게 시간을 보내는 것 자체에 의미를 둔다. 뭔가에 몰두하면서 잡념을 잊고 즐길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 하나의 취향이 될 수 있다. 앞으로도 취향산업은 최대한 선택지를 잘게 나눠 ‘작은 취미’들을 제안하는 형식으로 발전할 것으로 보인다.
애플 창업자 스티브 잡스는 “많은 사람이 원하는 것을 보여주기 전까지는 무엇을 원하는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스스로의 취향을 잘 몰랐던 건 그동안 잘 보지 못했기 때문일 수 있다. 이제 세상은 당신의 눈앞에 더 다양하고 작은 취미들을 펼쳐 보일 것이다. 눈을 크게 뜨고 몰랐던 취향을 발견해 보면 어떨까.
hkkim@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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