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을 나태하게 하거나
진취적으로 변모시키는 것은 제도적 환경의 차이
청년·저소득층에 재정지원 퍼붓기보다
'꿈' 키워줄 규제혁파가 시급"
이학영 논설실장
“나는 조선 사람들의 게으름이 기질의 문제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러시아 연해주로 이주한 조선인들의 활력과 번영을 본 뒤 잘못된 생각이었음을 깨달았다.” 19세기 말 영국 지리학자 이사벨라 비숍이 남긴 글이다. 그가 조선에서 본 사람들은 ‘착취와 가혹한 세금, 모든 벌이의 불안정’ 속에서 ‘연약하고 의심 많으며 음울한 더러움’에 처해 있었다.
그런 조선인들이 흉작과 관리들의 횡포를 피해 국경을 넘은 뒤에는 ‘척박한 환경에 맞서는 진취적인 인간’으로 변해 있더라는 것이다. 그로부터 한 세기가 훨씬 지났지만 ‘제도적 환경이 사람을 180도로 바꾼다’는 사실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대런 애스모글루 MIT 경제학과 교수가 갈파한 대로 ‘핏줄도 문화적 배경도 똑같은’ 남과 북의 한국인들이 경제적 성취에서 극단적 차이를 내고 있는 것이 단적인 예다.
유례없는 호황을 구가하고 있는 미국 일본 등과 정반대로 투자·생산·일자리 등의 총체적 부진에 빠져 있는 한국의 정치가들이 새겨야 할 화두(話頭)다. 문재인 정부 들어 ‘저성장과 양극화 동시 극복방안’으로 저소득층과 미취업 청년들에게 대규모 재정을 투입하고 있지만, 이들의 삶에서 활력이 높아졌다는 말은 들리지 않는다. 내년 예산을 사상 최대 규모로 늘리면서 각종 복지프로그램을 확충한 데 이어 취약계층에 대한 대대적인 세제 지원 확대 계획도 내놨지만, 이 역시 반응은 “글쎄”다.
‘포용적 성장’이라는 기치 아래 약자들의 소득을 높여주기 위한 정책을 총동원했지만, 갈수록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청년과 취약계층이 좌절하는 것은 당장 돈이 없어서가 아니라, 마음껏 꿈을 꿀 수 없기 때문”이라는 많은 사람들의 하소연 그대로다. 당장은 가진 게 없더라도 열심히 노력하면 큰 성취를 누릴 수 있다는 믿음이 있을 때 사람들은 희망이 생기고, 사회에는 활력이 넘쳐난다. 비숍이 연해주에서 만난 조선인들처럼.
유감스럽게도 문재인 정부는 우리 사회에 ‘꿈’을 채워줄 정책에서 길을 잃었다. 경제정책의 큰 축으로 소득주도 성장과 함께 내건 ‘혁신성장’이 공회전을 거듭해온 탓이다. 어떤 개혁이건 기득권 집단의 거센 저항이 따른다는 점에서 문재인 정부가 강력한 국민적 지지를 받았던 금쪽같은 첫 1년을 허송한 것은 특히 아쉽다. 최근 미국 일본 등 선진국은 물론 중국 등 후발국들에서도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혁신적인 비즈니스가 속속 등장하고 있어서 더욱 그렇다.
“세계 100대 혁신 사업 가운데 한국에서는 57개가 불가능하다” “우버가 한국에 세워졌다면 불법 기업으로 낙인 찍혀 사라졌을 것” 등의 얘기는 하도 많이 회자돼 진부할 정도가 됐지만, 상황은 조금도 달라진 게 없다. ‘한국판 우버’로 불렸던 카풀 스타트업 풀러스를 택시업계가 반발한다고 주저앉히고, 온라인 중고차거래 스타트업 헤이딜러가 급성장하자 기존에 없던 규제를 신설하면서 끌어내린 나라가 한국이다. 1위를 달렸던 줄기세포 산업을 생명윤리 논란 속에서 일본에 내준 것도 마찬가지다. 세계 100대 스타트업 가운데 미국 기업이 절반이 넘는 56개에 이르고, 중국도 24개나 되지만 한국은 한 곳도 없는 현실은 많은 것을 말해준다.
최근 문재인 정부가 뒤늦게나마 ‘혁신성장’의 고삐를 죄기 시작한 것은 다행이다. 문 대통령은 “이해당사자들을 몇 번씩이라도 설득해 혁신을 위한 규제개혁을 이뤄내라”는 특별 지시를 장관들에게 내렸고, 여당은 이달 국회에서 서비스산업 규제완화와 은산분리 예외적용을 통한 인터넷전문은행 활성화 등의 법을 통과시키기로 했다. 여당 대표경선에 나선 후보는 “원격진료와 우버 규제를 풀겠다”는 약속까지 했다.
규제개혁에 직접적인 돈은 들어가지 않지만, 문 대통령이 지적한 대로 기존 규제로 수혜를 누려 온 계층의 반발을 극복해야 하는 등의 비용이 만만치 않다. 때로는 정치적 지지 기반 붕괴라는 출혈도 감수해야 한다. 그런 이유로 너무나 많은 시간을 허비했다. 더는 머뭇거릴 시간이 없다. 문재인 정부의 ‘혁신성장 출사표’에 주목한다.
hak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