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 칼럼] 한국의 슈바이처들

입력 2018-07-24 19:03
홍영식 논설위원


의료계에선 우리나라의 해외 의료 봉사 선구자로 대암(大岩) 이태준을 꼽는다. 1883년 경남 함안에서 태어난 그는 세브란스의학교 졸업 후 독립운동을 위해 중국으로 갔다가 일본 경찰에 쫓기자 몽골로 망명했다. 1921년 38세에 일본의 공작으로 살해될 때까지 10년 가까이 현지에서 의료활동을 했다.

‘동국의국’이라는 병원을 설립해 당시 몽골인의 70~80%가 감염된 화류병(성병) 퇴치에 앞장섰다. 가난한 이들에게는 무료 인술을 펼쳤다. ‘몽골의 슈바이처’로 불린 그는 몽골 정부로부터 국가 최고 훈장을 받았다.

그의 정신을 이어받아 의료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오지에서 스러져가는 생명을 지키기 위해 헌신한 ‘한국의 슈바이처’들이 적지 않다. 아프리카 남수단 톤즈 마을에서 의료 봉사를 했던 이태석 신부의 사례는 널리 알려져 있다. 김대수·조규자 의사 부부는 사하라사막 중남부에 있는 니제르에서 무더위와 전염병을 무릅쓰고 1968년부터 19년간 인술을 펼쳤다.

‘코트디부아르의 슈바이처’로 불린 안순구 박사는 1969년부터 31년간 사랑의 의술을 펼치며 현지 부족의 명예 추장으로 추대됐다. 자고 일어나면 신발 속에 뱀이 똬리를 틀 정도로 오지인 보츠와나에서 1970년부터 30년간 인술을 펴고 그곳에서 생을 마감한 김정, 국교 단절로 대사관도 없는 상황에서 1972년부터 23년간 말라위와 레소토의 가난한 환자들을 돌본 김명호 등 수많은 의인들의 활동도 감동을 자아낸다.

국내에서도 ‘한국의 슈바이처’로 불리며 사랑과 헌신의 인술을 편 이들이 많다. “만약 제가 의사가 된다면 의사를 한 번도 보지 못하고 죽어가는 사람들을 위해 평생을 바치겠습니다”라는 맹세를 끝까지 지키며 가난한 사람들 곁에 머물렀던 장기려 박사, 한국인 최초의 의학박사 학위를 딴 뒤 전북 군산에서 농민 치료와 주민 교육에 헌신한 이영춘 박사, 결핵환자 퇴치에 앞장서고 병원비가 없어 애태우는 환자들에게 무료 진찰을 해 준 문창모 박사 등 일일이 손에 꼽을 수 없을 정도다.

‘쪽방촌 의사’ ‘영등포 슈바이처’로 유명한 신완식 요셉의원 의무원장이 올해 성천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그는 대학병원을 박차고 나와 10년 가까이 서울 영등포역 인근 쪽방촌 골목에서 노숙인과 알코올 중독자 등을 무료로 진료했다. 성천상은 JW중외그룹 창업자인 고(故) 성천 이기석 사장을 기려 제정됐다.

지금도 많은 의료진이 봉사 활동을 위해 동남아시아와 아프리카 등지로 줄지어 나가고 있다. 이들을 보면서 ‘세상은 아직 살 만하고 우리 곁에는 희망이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찌는 듯한 더위와 삶의 고단함도 잠시 잊는다.

홍영식 논설위원 ysho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