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걸자집' 풍습

입력 2018-07-18 19:31
김성녀 < 국립창극단 예술감독·중앙대 교수 sung-nyo@hanmail.net >


‘걸자집(乞字集)’은 글자를 구걸하는 책이란 뜻인데, 천자문에 있는 글자를 지인들에게 한 자씩 써 달라고 해 완성하는 책이다. 누가 어떤 글자를 만나게 될지는 순전히 우연이다. 만나는 사람에 따라 순서대로 쓰기 때문이다. 서울지역의 풍습으로 아이가 태어나면 동네 어르신이나 지인을 찾아가 한 자씩 써 달라고 해 아이의 천자문교본을 만든다. 1000명의 흔적을 담아내는 대단한 일임과 동시에 인쇄소도 없고 《한석봉 천자문》과 같은 단행본도 없던 시절, 교재 제작 노동력을 분산시키면서 지인과의 우정도 다지는 지혜로운 풍습이기도 하다.

이 ‘걸자집’을 알게 된 건 순전히 배우 오지혜 때문이다. 두 명(名)배우 오현경과 윤소정의 따님인 지혜는 영화배우와 라디오 진행자로 많은 사랑을 받은 연극계 동지이고, 불의를 못 참는 정의감으로 약자를 대변하는 투사이기도 하다.

지혜는 우연한 계기로 2005년 ‘걸자집’을 시작했는데 10년간 800여 명에게서 글자를 얻었고 4년의 휴지기 끝에 다시 시작하려고 꺼내 보니 다음 차례가 ‘다를 이(異)’라고 했다. ‘하늘 천(天)’으로 시작한 천자문은 한자 밑에 쓴 사람 이름까지 함께 적혀 있었다. 전혀 기억이 없는데 내 필체로 적힌 이름까지 있으니 기쁘기도 하고 믿지 못할 기억력에 민망하기도 했다. ‘옮을 추(推).’ 나에게 주어진 글자였다.

문소리 씨는 ‘이름 명(名)’을 쓰게 돼서 유명해졌고, 마광수 씨는 ‘글월 문(文)’을 쓰게 돼 매우 행복해했다고 한다. 그럼 ‘옮을 추’는 나에게 어떤 인연으로 다가왔을까?

인연이야 어떻든 나는 글자를 구걸하는 행위가 참 마음에 든다. 입시 지옥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작금의 교육풍토에서 애정 어린 관심으로 오랜 시간을 함께해 아이의 교육을 돕는 걸자집 풍습이야말로 인성을 되살리는 참교육의 전형이라는 생각도 든다.

나도 ‘걸자집’을 시작해야겠다. 한자문화권인 우리나라에서 천자문은 사고의 구조를 돕고 글의 어원을 알게 한다. 소리꾼들이 부르는 사설은 거의 칠언절구의 한시와 한문으로 돼 있다. 판소리 ‘춘향가’에는 이몽룡이 천자문을 공부하는 대목이 있다. 바로 ‘천자 뒤풀이’다. ‘♬자시(子時)에 생천(生天)하니 불언행사시(不言行四時) 유유창창(悠悠蒼蒼) 하늘 천(天)♬.’ 1000자 중 30 글자를 뽑아 글자 하나하나의 의미를 부여하면서 훈과 음을 붙여 부르는 유명한 대목이다.

1000명의 소리꾼에게 한 글자씩 쓰게 해 한문도 익히고 소리의 의미도 깨우치게 하겠다는 계획만으로도 벌써 행복해진다. 아~ 이것이 바로 지혜에게 옮은 ‘옮을 추’와의 인연이로구나! 우연한 깨달음과 함께 1000명의 인연을 만날 생각을 하니 박 타서 부자가 된 흥보씨가 된 기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