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광엽 지식사회부장
오늘 한국을 지배하는 언어는 ‘다같이 잘먹고 잘살기’다. 그동안 우리를 질주시켰던 ‘잘살아 보세’라는 말은 역사의 뒤안길로 총총 사라졌다. 그 빈자리는 ‘부의 재분배와 공유’를 요구하는 목소리로 채워지고 있다. 주민 모두에게 100만원대의 수당(기본소득)을 월급처럼 주겠다는 도지사까지 등장했다. 여당 대표는 땅이 불평등의 원흉이라며 한술 더 떠 중국식 ‘토지 공유’를 주창하고 나섰다.
‘다같이 잘먹고 잘살기’는 복잡미묘한 구호다. 누군가 내 몫을 뺏고 있다는 분노의 정서가 저변에 흐른다. ‘나의 가난은 사악한 사회제도의 결과’라는 주장이다. 최저임금이 다락같이 올랐는데 올해 또 43%나 인상하자는 노동계의 몰염치한 주장도 그래서 가능하다.
이런 피해의식에 맞장구치는 중산층과 부자, 지식인이 줄을 잇는다. ‘나 혼자 잘 살면 무슨 재민겨’ ‘좀 못 살아도 평등하면 괜찮아’라는 ‘새 개념’의 장착이다. 초일류 삼성도 이들에게는 불평등의 상징이자 전령일 뿐이다.
기본소득·토지공유제 주장까지
달라진 공기에 둔감한 누군가가 ‘효율과 경쟁’을 들먹였다가는 수구니 적폐니 하는 뒷담화를 감당해야 한다. ‘작은 정부, 큰 시장’을 설파하는 기업가나 지식인은 피도 눈물도 없는 ‘공공의 적’쯤으로 매도당한다. 자유한국당 의원들이 단체로 무릎 꿇고 ‘샤일록의 후예였노라’고 자백한 촌극 그대로다. 그리하여 대한민국을 번영으로 이끈 암묵지는 일순간에 약자를 등치는 사술로 낙인찍히고 말았다. ‘보수 적통’을 자처하는 이들에 의해….
급격한 변화의 중심에 청와대가 자리하고 있다. ‘사람 사는 세상’이라는 문재인 대통령의 오랜 슬로건은 내용적으로 다같이 잘먹고 잘살기와 대동소이하다. 최저임금, 비정규직, 근로시간 등의 논쟁적 이슈를 비타협적으로 밀어붙이는 데서 잘 드러난다.
‘다같이 잘먹고 잘사는 나라’는 인류의 오랜 로망이다. 천재 사상가와 정치가들이 이 꿈에 일생을 바쳤다. 결말은 전부 비극이다. 사회주의 실험은 허망했고, 노동자를 열광시켰던 나치즘은 20세기를 전체주의로 물들였다. ‘부의 재분배’에 올인한 파판드레우의 그리스도 국가부도를 맞았다. 베네수엘라 브라질 아르헨티나 등 남미 좌파국들의 어설픈 시도는 논할 가치도 없다.
분배에서 보수에 밀리는 진보
이제 ‘사람 사는 세상’을 향해 달린 촛불 정부의 1년이 심판대에 올려질 시간이다. 지금까지는 비관 무드다. ‘재난적 상황’이라던 양극화가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된 게 가장 아프다. 청년실업률도 재앙적 수준이다. 약자들이 최대 피해자가 되는 아이러니다.
분배만이 아니다. 생산 소비 투자가 전부 꺾였다. ‘부의 공유’를 기대했지만 ‘고통의 공유’를 걱정할 지경이다. 부자의 돈을 빈자에게 퍼주는 남유럽과 남미의 ‘약탈적 모델’을 답습한 데 따른 예고된 부진이다. 임금 인상, 연금 확대, 증세, 공무원 증원 등의 패키지는 비효율적 간섭주의 정책의 전형이다. 간섭을 복지라 우기고, 부작용을 또 다른 간섭으로 땜질처방하는 식이라면 악순환이 불가피하다.
2년차의 문재인 정부 행보에서 특히 미덥지 못한 대목이 현실 부정과 왜곡이다. ‘재난적’이라며 호들갑을 피웠지만 한국의 분배상황은 ‘재난적’ 수준은 아니다. 인구 5000만 명 이상의 OECD 국가 중 우리보다 평등한 곳은 독일 정도에 불과하다. 미국 영국 일본 캐나다 이탈리아 스페인 등이 전부 한국보다 불평등국이다. 앞선 이명박·박근혜 정부에서 불평등이 뚜렷한 개선추세를 보인 것도 팩트다. 문재인 정부와 닮은꼴인 노무현 정부 때 분배가 최악이었다는 점 역시 직시해야 할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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