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로시간 어겨도, 소화기 잘못 놔도 CEO 형사처벌… "결재하기 겁난다"

입력 2018-07-08 17:31
수정 2018-07-09 13:44
위기의 한국 기업 - 떨고 있는 CEO들

근로기준법·산업안전법·화재예방법 개정안…
전국 사업장 사정 세세하게 파악 힘든데도
사고만 나면 CEO가 모든 책임 떠안을 가능성


[ 도병욱/고윤상 기자 ] 국내 10대 그룹 계열사 중 한 곳인 A사의 K사장은 이달부터 매일 직원들 근무시간을 점검하고 있다. 지난 1일 근로시간 단축제도(주 52시간 근무제)가 시행되면서 근로시간 규정을 어기면 대표이사가 형사처벌될 수 있어서다. “사장님을 형사처벌받게 하려고 일부러 주 52시간 넘게 일할 수도 있습니다”라는 노조 대표 농담도 섬뜩하게 다가왔다. 근로시간 단축만 문제가 되는 게 아니다. 기업 최고경영자(CEO)의 처벌 수위를 높이는 법률 개정안이 줄줄이 대기 중이다. K사장은 “교도소 담장 위를 걷는 심정으로 경영해야 할 판”이라며 “기업을 운영하기가 갈수록 두려워지고 있다”고 털어놨다.

◆근로시간 위반 줄소송 우려

근로기준법에 따르면 최장 근로시간(주 52시간)을 위반한 사업장의 사업주는 ‘2년 이하 징역 또는 2000만원 이하 벌금형’에 처해진다. 근로시간이 주 68시간에서 주 52시간으로 줄기 전에도 처벌 규정은 있었지만, 사실상 사문화된 조항이었다. 하지만 앞으로는 달라질 것이라는 전망이 많다. 고용노동부가 근로감독관을 확충해 단속을 강화하겠다고 밝혔기 때문이다.

근로시간 기준이 모호하고 노사 합의가 필요한 사안도 많아 예상치 않게 CEO가 처벌 대상이 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게 재계의 우려다. 당·정·청이 6개월간의 계도 기간에는 처벌하지 않겠다고 했지만 회사에 불만을 품은 해고자나 노조가 고소·고발하면 처벌을 피하기 힘들다. 제3자가 동료 직원 등의 근로시간 위반 사실을 고발해도 된다는 고용부 해석도 CEO들을 불안에 떨게 만드는 대목이다. 한 중견기업 대표는 “CEO가 미처 파악하지 못하는 사이에 일부 직원의 근로시간이 주 52시간을 초과할 수도 있다”며 “무슨 수로 모든 직원의 근로시간을 관리할 수 있겠느냐”고 반문했다.


◆커지는 CEO의 법적 책임

고용노동부는 지난 2월 산업안전보건법 전부개정안을 입법예고했다. 산업재해에 대한 사업주 책임을 강화하는 내용을 담았다. ‘사업주가 안전·보건조치를 위반해 근로자를 사망에 이르게 하면 1년 이상, 7년 이하 징역 또는 1억원 이하 벌금에 처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7년 이하 징역 또는 1억원 이하 벌금’으로 돼 있는 현재 규정과 달리 징역 하한선(1년)을 신설했다. 협력회사 근로자가 사망했을 때도 원청회사 사업주를 ‘1년 이상, 7년 이하 징역 또는 1억원 이하 벌금형’으로 처벌하도록 했다. 한국경영자총협회 관계자는 “CEO가 전국 각지 사업장이 안전·보건 관리를 제대로 하고 있는지 모두 점검하기는 힘들다”며 “안전·보건조치를 어겼다는 이유로 사업주를 징역형으로 처벌하겠다는 나라는 세계 어디에도 없다”고 지적했다.

김영호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이 대표발의한 화재예방법(화재예방, 소방시설 설치·유지 및 안전관리에 관한 법) 개정안을 놓고도 걱정하는 목소리가 많다. 건축물의 피난·방화시설을 폐쇄·훼손하면 1년 이하 징역 또는 1000만원 이하 벌금에 처하는 게 핵심 내용이다. 상해나 사망사고가 나면 처벌 수위가 높아진다. 사고가 터지면 결국 CEO가 모든 책임을 떠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게 법조계 시각이다. 한 로펌 관계자는 “CEO가 소방시설을 훼손할 의도가 없었더라도 결재라인에 있으면 책임을 져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 4월17일부터 시행된 하도급법(하도급거래 공정화에 관한 법률)도 마찬가지다. 이전에는 협력업체에서 받은 기술자료를 원청업체가 유용할 때만 사업주를 처벌했지만 지금은 제3자에게 기술을 전달만 해도 처벌 대상이 된다.

◆일상이 된 압수수색·구속영장

검찰과 경찰, 국세청, 공정거래위원회, 금융감독원, 관세청 등도 경쟁하듯 기업인과 기업을 겨냥하고 있다. ‘물컵 갑질’ 이후 한진그룹은 오너 일가 전체가 수사를 받고 있다. 삼성과 현대자동차, LG, 롯데 등은 올 들어 한 차례 이상씩 압수수색을 받았다. 포스코와 KT 등 오너가 없는 기업은 정권 교체 뒤 ‘외풍’에 몸살을 앓고 있다.

재계 관계자는 “기업 실적이 나빠지고 있는데 주요 기업 중 사정·감독기관의 수사 또는 조사로부터 자유로운 곳이 없다”며 “기업인을 잠재적인 범죄자로 취급하는 현실에서는 기업가정신이 발휘되는 도전과 혁신은 물론 과감한 투자 및 고용 창출도 불가능하다”고 지적했다.

도병욱/고윤상 기자 dodo@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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