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준의 데스크 시각] 새로운 국가대표를 기다리며

입력 2018-06-24 17:34
김용준 중소기업부장


[ 김용준 기자 ] 2000년 세계 자동차업계는 인수합병(M&A) 열풍의 한가운데 있었다. 5대 업체 외에는 살아남기 힘들 것이란 전망이 나왔다. 당시 자동차의 도시 미국 디트로이트에 갈 일이 있었다. 전문가들에게 현대자동차의 미래를 물었다. 그들은 비슷한 답을 했다. “독자생존은 힘들 것이다.” 디트로이트에는 현대차가 다임러벤츠의 계열사가 될 것이란 얘기가 파다했다.

비슷한 시기 미국 시카고에 있는 시어스백화점 본사에서 소동이 있었다. 몇몇 동양인들이 50㎏이나 되는 TV를 들고 사무실로 ‘돌진’했다. 삼성전자 직원들이었다. 시어스가 백화점에 삼성 제품을 진열해 주지 않자, “제품이라도 한 번 보고 얘기해 달라”며 일을 벌였다. 당시 TV 시장의 지배자는 소니였다.

한국의 질주 20년

한국 대표 기업들은 2000년만 해도 그런 처지였다. 10년 후인 2010년 1월. 일본 닛케이비즈니스는 특집호에서 삼성 LG 현대차 포스코를 다뤘다. 닛케이는 이들을 ‘한국의 4대 천왕’이라고 칭하며 배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럴 만했다. 삼성전자는 제품 진열을 구걸하는 신세에서 TV 시장 1위로, 스마트폰 시장에서는 애플의 유일한 경쟁자가 됐다. 미쓰비시자동차 도면을 훔치다시피 해 엔진 제작을 시작한 현대차는 세계 자동차업계 5, 6위를 다투는 수준으로 도약했다. LG는 TV와 휴대폰 시장에서 글로벌 플레이어로 성장했다. 이 과정에서 일본 전자·자동차 업체들은 한국에 영토를 빼앗겼다. 당시 한 일본 학자는 “마쓰시타 고노스케, 모리히타 아키노(소니) 같은 경영자가 있었으면 이렇게 당하지만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할 정도였다.

예견한 사람도 있었다. 1993년 이건희 삼성 회장은 이런 말을 했다. “이제 일본에는 마쓰시타도 혼다도 없다. 이것이 우리에게 기회가 될 수도 있다.” 일본을 대표하는 전설적 경영자들이 세상을 떠난 후 한국 기업들이 기회를 맞을 수 있을 것이란 얘기였다. 실제 한국 기업이 질주한 1990년대 후반부터 20년간 교세라의 이나모리 가즈오를 제외하면 일본의 대표적 기업인 이름을 거의 기억하지 못한다.

이 회장, 정몽구 현대차 회장, 고(故) 구본무 LG 회장은 이렇게 한국 제조업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여러 가지 비판도 있지만, 이들이 ‘기업 전쟁’의 시대에 국가대표 역할을 충실히 해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다음 20년은 누가

기업을 이어받아 한국 제조업을 글로벌 수준으로 올려놓은 2세대 주인공들의 시간이 끝나고 있다. 한국 제조업은 국가대표 세대 교체기를 맞고 있다. 그러나 상황은 낙관적이지 않다. 최근 혁신 강의에 등장하는 이름은 마윈(알리바바), 레이쥔(샤오미) 등 중국 기업인들이다. 미국에서 일본을 거쳐 한국으로 넘어온 전자산업 주도권이 중국으로 넘어가고 있다는 징후이기도 하다.

이 지점에서 한국 재계의 숙제를 발견한다. 차세대 국가대표가 될 기업인들은 그냥 물려받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실력으로 입증해야 한다. 해외 시장을 두드리는 중소·벤처기업인들은 글로벌 플레이어로 성장해 미래의 삼성전자 자리를 준비해야 한다. 이들에게만 맡겨둘 일은 아니다. 지방선거에서 완승한 문재인 정부와 여당은 경제로 눈을 돌려야 한다. 개혁의 물결이 흘러간 다음 국민들은 경제로 정부를 평가할 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또 ‘경제 전쟁’의 격전지에 내보낼 국가대표의 후원자이자 인큐베이터 역할은 정부의 거부할 수 없는 과제이기도 하다.

juny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