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 칼럼] '카추샤 로켓'

입력 2018-06-17 18:21
수정 2018-06-20 14:13
2차 대전 때 독일군의 6연장 로켓포인 네벨베르퍼(Nebelwerfer)는 가공할 위력을 발휘했다. 특유의 굉음과 함께 연발로 쏘아대는 로켓 세례에 모두가 혼비백산했다. 소련군은 주요 도시인 스탈린그라드까지 한때 뺏기고 말았다.

이때 소련이 네벨베르퍼에 맞서기 위해 개발한 것이 트럭에 발사대를 장착한 다연장 로켓포 ‘카추샤(Katyusha) 로켓’이다. ‘카추샤’는 러시아 여자이름 예카테리나의 애칭이자, 전장에 나간 연인을 그리워하는 민요 제목이다. 톨스토이 소설 《부활》의 여주인공 이름이기도 하다.

이 로켓은 스탈린그라드 탈환전에서 빛을 발했다. 14~48개의 로켓을 연속으로 발사하며 약 4ha(4만㎡)에 이르는 지역을 초토화했다. 독일군은 네벨베르퍼보다 무서운 신무기 앞에 두 손을 들었다. 이들은 요란한 소리와 오르간을 연상시키는 발사대 모양 때문에 카추샤 로켓을 ‘스탈린의 오르간’이라고 불렀다.

소련군은 퇴각하는 적을 추격하며 독일 본토로 치고 들어가 동부지역 대부분을 쓸어버렸다. 이후 카추샤 로켓은 T-34 전차, IL2 슈투르모빅(공대지 전투기)과 함께 소련군의 3대 병기로 평가 받았다.

2차 대전 후에는 일부 모델이 북한군과 중공군에 전해졌고 6·25 때 투입됐다. 현재 장사정포(長射程砲)로 불리는 북한의 다연장 로켓포(방사포)는 이를 개량한 것이다. 그래서 외국에서는 장사정포 대신 카추샤 로켓으로 통칭한다. 북한이 ‘서울 불바다’를 위협할 때 근거로 삼은 무기가 장사정포다.

북한은 군사분계선(MDL) 인근 북측에 1000여 문의 각종 포를 배치해놓고 있다. 이 가운데 사거리 54㎞의 170㎜ 자주포 6개 대대와 사거리 60㎞의 240㎜ 방사포 10여 개 대대 330여 문이 남한의 수도권을 직접 겨냥하고 있다.

최근 남북 군사당국이 북한의 장사정포를 후방으로 철수하는 문제를 물밑에서 논의 중인 모양이다. 국방부의 부인에도 불구하고 여당 수석대변인의 환영 논평이 나오고 있다. 북은 이에 상응해 한국군의 155㎜자주포와 미군의 다연장로켓 철수 등을 요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군사 전문가들의 반응은 기대 반 걱정 반이다. 한쪽에서는 핵무기 못지않게 강력한 재래식 무기를 뒤로 물리면 긴장 완화에 도움이 될 것이라며 기대를 보이고 있다. 다른 쪽에서는 첨단기술에 힘입은 우리 측의 전력 강화로 남북 간 화력 차이가 역전된 상황에서 섣부른 양보보다는 신중한 협상이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우리나라는 15세기에 이미 이동식 다연장 로켓인 신기전(神機箭)을 개발했다. 500여 년이 흐른 지금 남북이 20세기 재래식 로켓과 21세기 핵·미사일을 놓고 줄다리기를 하고 있으니, 묘한 역사의 아이러니다.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