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훈의 한국경제史 3000년
(5) 삼국의 경제와 사회
기근 대책 마련했지만 한계
지배세력 모여 사는 곳에 한정
王都조차도 관리에 허점 보여
세대복합체가 지배 기초 단위
성인 남성 10명 묶어 稅 부과
40척 되는 포 1필 바치기 위해
열 세대가 공동노동으로 직조
농업
4∼7세기의 논 유적은 지금까지 울산, 창원, 진주, 대구, 부여, 화성 등 도합 10여 곳에서 발굴됐다. 한 곳의 예외가 있지만, 논 한 구획의 면적은 대개 99㎡(30평) 안팎으로 작은 규모다. 논의 위치는 구릉의 완만한 하단부이며, 관개는 구릉을 흘러내리는 소량의 물을 이용하는 자연 방식이었다. 논과 더불어 수로의 유적도 발굴됐는데, 취수(取水)시설이 없어 배수로로 보인다. 삼국시대의 논농사는 아직 저수지나 보를 통한 인공관개와는 무관했다. 자연관개이기 때문에 논의 면적은 클 수 없었고, 혼자서도 조성·관리할 수 있는 정도였다. 논갈이의 도구는 삽이나 괭이 같은 수경구(手耕具)였으며, 소를 이용한 쟁기갈이는 아직 보급되지 않았다. 삼국시대의 논은 쟁기를 들일 만큼 넓지 않았다.
밭 유적의 수는 논보다 많다. 관개의 제약이 크지 않기 때문에 단위 구획이 논보다 넓었다. 앞서 미사리의 밭 유적을 소개했다. 발굴된 면적만 해도 9900㎡(3000평)인데, 원래는 그보다 훨씬 컸다고 짐작된다. 이랑과 고랑의 폭이 각각 1m를 넘어 토지 이용은 매우 조방(粗放)적이었다. 유적에서 쟁기갈이의 흔적은 찾을 수 없다. 밭갈이는 호미 등의 수경구를 이용해 흙을 긁어내는 방식이었으며, 노동의 주체는 10개 연(烟)이 결합한 세대복합체의 집단노동이었다.
인골에 대한 안정동위원소 분석은 삼국시대의 주요 작물이 벼, 맥류, 두류 등 C3계 식료였음을 이야기해 주고 있다. 그런데 논 유적의 상태로부터 농업의 중심이 밭농사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삼국시대의 논농사 수준을 과대평가해서는 곤란하다. 또한 인골 분석은 여성이 남성보다 C3계 식료를 더 많이 섭취했음을 전하고 있다. 이는 여성이 동물성 단백질로부터 상대적으로 차단된 가운데 두류 등 식물성 단백질을 주로 섭취했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밭농사를 담당한 노동이 주로 여성이고, 남성의 생산활동은 여전히 수렵에 큰 비중을 뒀던 당시의 생태 환경을 상상할 수 있다. 또한 인골 분석은 유소(幼少)층이 성인에 비해 조, 수수, 기장 등 C4계 식료를 더 많이 섭취했음을 알려준다. 이 사실은 빈부나 연령 계층에 따라 식료가 달랐을 가능성을, 하층민의 주요 식료가 조, 수수, 기장이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지배체제
고구려를 위시한 최초의 국가들이 백성을 어떻게 지배하고 무엇을 수취했는지에 관한 기록은 중국의 《수서(隋書)》에서 처음 찾아진다. 6세기 말~7세기 초의 고구려를 대상으로 한 것이다. 그 기록에 의하면 고구려는 세(稅)로서 포(布)와 곡(穀)을 수취했다. 포에는 비단, 마포, 모시 등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 물목은 지방에 따라 달랐을 터다. 곡의 물목도 지방에 따라 달랐겠는데, 동 기록은 벼만을 이야기하고 있다. 읍락, 국, 국가의 지배 계층은 쌀을 주요 식료로 했다. 쌀은 정치적 위신재로서 하층민의 공납물이었다. 하층민이 쌀을 주식으로 삼는 것은 거의 1000년이 지난 16세기부터다.
세 수취의 기초 단위는 10명의 성인 남자로 이뤄진 호(戶)였다. 종래 역사가들은 그 호의 실체가 무엇인지, 결과적으로 세 부담이 어느 정도인지를 둘러싸고 큰 혼선을 빚었다. 지금까지 소개한 고고학적 증거에서 분명하듯이 그것은 개별 세대인 연이 10개 결합한 세대복합체를 말했다. 고구려는 그 호에 대해 포 1필과 벼 1석(10두)을 수취했다. 포 1필은 40척(尺)이다. 그것을 열 세대가 4척씩 짜서 이을 수는 없다. 다시 말해 포 1필은 열 세대가 공동으로 직조했다. 반면 벼 10두는 개별 세대가 보유한 벼 가운데 1두씩을 갹출하는 방식으로 모을 수 있다. 그래도 공납하는 벼의 품질에 문제가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고구려는 소비생활의 단위로 분리된 개별 세대 열이 제반 생산과 공납을 위해 공동 노동으로 결속한 세대복합체를 지배의 기초 단위로 삼았다.
나아가 고구려는 취락을 공동수취의 단위로 지배했다. 앞서 지적했듯이 당시의 취락은 주거지 50기를 표준 형태로 했다. 곧 50개 세대에 5개 세대복합체의 집합이었다. 고구려는 그에 대해 포 5필과 벼 5석을 공동부담으로 수취했다. 그런데 세대복합체와 취락의 규모에는 편차가 컸다. 이에 고구려는 호의 크기를 3등급으로 나누어 세의 부담을 조정했다. 그 결과 취락과 읍락(촌)에는 공동부담의 크기를 나타내는 특정의 과표가 부여됐다. 신라의 울진봉평비에서 그 같은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수취의 중심은 포에 있었다. 그래서 고구려의 수취 규식은 포를 먼저 언급했다. 일반적으로 비단 1필은 벼 1석보다 2∼3배 높은 가치였다. 포를 직조하기 위해 세대복합체와 취락을 공동노동의 대오로 편성한 것이야말로 삼국이 구축한 백성 지배체제의 가장 중요한 특질을 이뤘다.
권농과 진휼
국가는 지배세력의 수탈을 위한 도구만이 아니다. 국가는 개별 공동체로서는 불가능한 공공기능을 수행하고, 이를 통해 평화와 번영의 질서를 창출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국가는 산적떼와 다를 바 없으며 결코 영속할 수 없다. 삼국은 논밭을 개간하고, 방조제를 쌓고, 저수지를 파고, 철제 농구를 보급하고, 곡식을 비축해 흉년에 대비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기원 후 33년 백제의 다루왕(多婁王)은 주군(州郡)에 영을 내려 처음으로 벼농사를 시작하게 했다. 그대로 믿기는 곤란한 이른 시기에 관한 기록이지만, 국가의 지배를 정당화하는 공공기능으로서 권농(勸農)을 중시한 삼국인의 관념을 대변하고 있다.
331년 김제에 벽골제가 세워졌다. 《삼국사기》는 신라 흘해왕(訖解王)이 세웠다고 하는데, 이는 잘못이다. 당시 김제 일원은 신라의 영토가 아니었다. 필자는 마한 55국의 하나인 벽비리국이 아닐까 짐작한다. 김제 일원은 표고가 해수면과 거의 동일한, 한반도에서 가장 낮은 연안 평탄지이다. 벽골제가 큰 저수지라는 통념은 후대에 잘못 형성된 것이다. 벽골제는 바닷물의 침입을 막는 방조제로 세워졌다. 502년 신라의 지증왕(智證王)은 처음으로 쟁기갈이를 보급했다. 531년 신라의 법흥왕(法興王)은 전국적으로 제방을 수리하라는 영을 내렸다. 536년에는 경북 영천에 청천제라는 저수지를 축조한 다음 비석을 세웠다. 비석에 따르면 축조에 동원된 사람이 7000명에 달했다.
삼국은 큰 흉년이 들면 창고에 비축한 곡식을 풀어 기민을 구제했다. 194년 고구려 고국천왕(故國川王)은 사냥을 가다가 길에서 울고 있는 사람을 만났다. 흉년에 품을 팔 데가 없어 노모를 봉양할 길이 없다는 사연이었다. 이에 매년 3∼7월 관청의 곡식을 농민에게 나눠 준 다음 10월에 거둬들이는 진대법(賑貸法)을 실시했다. 삼국이 행한 진휼은 대개 임시방편에 그쳤으며, 그 범위도 지배세력이 모여 사는 왕도와 그 주변에 한정됐다. 628년 신라에 큰 가뭄이 들어 그해 겨울에 심한 기근이 발생했다. 당시 관리들이 궁중의 창고에서 곡식을 훔쳐 나눠 먹었다. 이때 검군(劍君)이란 관리가 홀로 훔친 곡식을 나눠 받지 않았는데, 이로 인해 다른 관리의 미움을 사서 살해되고 말았다. 이 사건은 신라의 왕도에서조차 진휼이 제도화되지 않았음을 이야기하고 있다.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
초창기 한국사 연구자들은 마르크스주의 역사관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 그들은 최초의 국가는 노예제사회라는 마르크스주의 사관에 따라 삼국시대를 노예제사회로 규정했다. 그런 생각은 지금도 적지 않은 영향력으로 남아 있다. 국가의 성립과 더불어 왕실과 귀족 가문에 가내 노예가 생겨난 것은 사실이다. 종족 간, 부족 간, 국가 간 충돌이 잦아지면서 포로 노예가 발생한 추세도 부정하기 힘들다.
그렇지만 노예가 생산노동의 지배적 형태였음을 알리는 기록이나 증거는 단 한 조각도 전하지 않는다. 《삼국사기》에서 ‘노(奴)’라는 한자를 검색하면 통일 이전 시대에는 총 61회 나온다. 그중 절반 이상이 귀족의 이름과 성(城)의 지명으로 쓰였다. 다시 말해 노를 둘러싼 비천 관념은 아직 성립하지 않은 시대였다. 여기까지 설명한 대로 삼국시대의 사회 구성은 연→세대복합체→취락→읍락→국→국가의 누층적 위계로 편성됐다. 노(奴)는 각 위계에서 하급자가 상급자에게 정치적·군사적으로 신종(臣從)하는 관계를 대변했다. ‘노예제사회’설은 그리스 신화에서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아 키가 자신의 침대보다 길면 잘라 죽이고, 짧으면 늘려 죽였다는 ‘프로쿠르스테스의 침대’를 연상시킨다.
이영훈 < 前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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