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선의 'ASEAN 톺아보기' (1) ] 新남방정책 로드맵이 필요하다

입력 2018-06-11 19:34
김영선 < 前 한·아세안센터 사무총장 >


한국인이 가장 많이 찾는 해외 여행지는 어디일까. 중국도 일본도 미국도 아니고 아세안(동남아시아국가연합) 지역이다. 지난해 750만 명이나 되는 한국인이 아세안 지역을 방문했다. 한국을 방문하는 아세안 여행객도 꾸준히 증가하는 추세다. 이렇게 양측의 인적 교류가 긴밀해진다는 것은 바람직한 현상이다. 서로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니 우의도 좋아지고 협력도 강화된다.

지난해 사드(고고도 미사일방어체계) 문제 등으로 중국과의 관계가 어려워지면서 ‘포스트 차이나’로서 아세안의 중요성이 더욱 부각됐다. 특히 문재인 대통령은 취임 직후 아세안과의 관계를 한반도 주변 4강 수준으로 격상시키겠다는 의지를 밝히고 사상 처음으로 대통령 특사를 아세안 국가에 파견했다. 이어 11월 인도네시아, 베트남, 필리핀 순방을 계기로 신(新)남방정책과 ‘한·아세안 미래 공동체 구상’을 발표함으로써 대(對)아세안 정책이 이젠 우리 외교의 주요 과제로 자리잡을 것임을 분명히 했다.

아세안은 제2 교역·투자 대상

우리는 아세안과 아주 가깝고 긴밀한 협력관계를 발전시키고 있다. 한국에 아세안은 제2의 교역 및 투자 대상이며 건설 수주 파트너다. 지난해 아세안에 953억달러를 수출해 415억달러의 흑자를 봤다. 한국의 무역흑자 총액이 952억달러였으니 아세안과의 교역은 우리 경제에 큰 도움을 주고 있는 셈이다. 중국과의 경제협력이 절대적으로 많은 것 같지만, 대아세안 투자는 2014년 이후 대중국 투자를 웃돌고 있다. 하지만 과거 우리 정부는 ‘대아세안 정책의 비전과 전략은 무엇인가’, ‘한국은 아세안을 파트너로서 어떻게 인식하고 있나’라는 질문에 명확한 답을 제시하지 못했다.

그런 의미에서 문재인 정부의 신남방정책은 ‘더불어 잘사는, 사람 중심의 평화공동체’를 실현한다는 비전과 함께 정책 방향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자못 의미가 크다. 중요한 것은 구체적인 추진 전략과 실천 로드맵이 하루빨리 마련돼야 한다는 점이다. 모멘텀이 약화돼서는 안 된다.

지금 세간의 이목은 온통 싱가포르의 도널드 트럼프·김정은 정상회담 결과와 향후 전개될 동북아 정세에 쏠려 있다. 다른 이슈는 별 주목을 받지 못하는 게 현실이다. 과거에 그랬던 것처럼 대아세안 정책이 때가 되면 한 번 불고 지나가는 ‘계절풍’이 돼서는 안 된다. 이미 몇몇 아세안 국가로부터 신남방정책의 내용이 과거와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다른지, 북한 핵문제가 진전돼 남북관계가 개선되면 한국 기업들이 북한 쪽에 더 관심을 갖는 것은 아닌지 하는 우려가 나타나고 있다고 한다.

아세안과 인도를 대상으로 하는 신남방정책은 극동과 유라시아를 대상으로 하는 신북방정책과 연결해 ‘번영의 축’을 만들고, 이를 한반도를 중심으로 한 동북아 평화협력 플랫폼의 ‘평화의 축’과 연결해 ‘동북아 플러스 책임공동체’를 실현하겠다는 우리 정부의 야심찬 구상이다. 다시 말해 한반도의 평화와 번영은 신남방정책과 신북방정책의 성공적인 추진을 통해 뒷받침될 때 더욱 견실해질 수 있다. 따라서 최근 북한 비핵화와 남북관계에만 집중하느라 신남방정책 추진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될 것이다. 오히려 관련 국가와의 관계를 더욱 발전시키는 계기로 활용해야 한다.

新북방정책과 연계해 추진해야

역사적인 북·미 정상회담이 올해 아세안 의장국인 싱가포르에서 열린다는 사실도 의미가 있다. 아세안 10개국 모두가 북한과 외교관계를 맺고 있으며, 북한도 아세안 국가들과의 관계를 중요시하고 있다. 1995년 ‘동남아 비핵지대화 조약(SEANWFZ)’을 체결한 아세안은 북한 핵문제를 이 지역의 중대한 안보 위협으로 인식해 한국의 입장을 지지하고 있다. 또 북한이 개혁·개방의 길로 나아갈 때 벤치마크할 모델로 베트남과 싱가포르가 거론되는 것도 주목할 만하다. 긴밀한 협력관계를 맺고 있는 아세안과 협조해 북한의 비핵화와 개혁·개방을 더 효과적으로 이끌어낼 수 있을 것이다.

역사적인 판문점 남북한 정상회담과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으로 우리는 한반도의 평화와 번영을 위한, 아직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길을 가고 있다. 그런 과정에서 ‘하나의 비전, 하나의 정체성’을 모토로 많은 난관을 극복하고 하나로 통합된 공동체를 출범시켰던 아세안 국가들로부터 배울 점이 많을 것이다. 전략적 파트너인 아세안과 마음과 마음이 이어지고 호혜적인 협력으로 함께 잘사는 평화로운 공동체를 실현할 수 있는 신남방정책의 구체적인 로드맵이 조속히 제시되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