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포클레스와 민주주의
배철현의 그리스 비극 읽기 (3) 깨달음
인간은 오감을 통해 새로운 사실을 배우고 자신의 삶의 일부로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 그 과정을 ‘깨닫는다’라고 표현한다. ‘깨달음’이란 자신도 모르게 옹고집처럼 감싸고 있는 자기중심적인 세계관을 깨는 활동이다. 내가 스스로 의도적이고 정기적으로 깨침을 수련하지 않는다면 나는 점점 더 ‘자기’라는 수렁에 빠져 나도 모르게 이기적이며 무식한 인간으로 변할 것이다. 깨달음을 가능하게 만드는 요소는 변화를 갈망하는 나의 결심이다. 내가 스스로 자신을 바라보고, 그런 과거의 자신을 불쌍하게 바라보는 연민의 마음을 연습해야 한다. 어리석은 자신에 대해 꾸준하게 연민을 연습한 자만이 자신이 아니라 타자들, 동료 인간들과 반려동물들을 연민의 눈으로 바라볼 수 있다.
이야기
인간은 특히 눈을 통한 보기와 귀를 통한 듣기로 배운다. 눈을 통해 자신의 상상을 뛰어넘는 장면을 경험할 때 배운다. 동서고금의 고전이나 경전들은 주위에서 언제나 우리의 눈을 기다린다. 우리의 눈은 욕망을 자극하는 광고, 중독과 충성을 요구하는 게임에 익숙해져 있다. 이런 유혹의 특징은 끝과 만족이 없다는 점이다. 그러나 수백 수천 년 동안 우주에서 가장 혹독한 심판자인 시간이란 괴물의 검증을 받은 고전과 경전은 소중한 것을 선물한다. 이것들을 소중하게 여기고 깨달음의 수단으로 여기려는 사람들에겐 중독이 아니라 만족을 선사한다. 만족은 나의 충성을 애타게 요구하지 않지만 나의 의식을 확장해 취미를 선물한다. 고상한 취미를 지닌 자가 문명인이며 문화인이다.
인류는 아마도 기원전 3만2000년께부터 다른 동물들은 도저히 따라 할 수 없는 인간만의 취미를 가졌다. 이 취미가 인간을 유인원과 구별시켰을 뿐만 아니라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었다. 인류의 조상 호모사피엔스사피엔스는 태곳적 천지가 요동치면서 만들어진 지하 동굴로 내려가 자신들의 오감을 자극해 오래된 자신을 깨고 새로운 자신을 발견하는 의례(儀禮)를 거행했다. 그들 중 가장 용맹한 사냥꾼이 사냥하면서 만난 거대한 들소나 야생사슴에 관한 생생한 이야기를 동굴 안에 옹기종기 앉아 있는 동료들에게 감동적으로 말했다. 몇몇은 이 이야기를 동굴 벽에 웅장하게 그렸다. 거대한 동물을 사냥한 경험을 들은 현생 인류는 더 이상 과거의 인간이 아니다. 그들은 이야기를 들음으로써 자신이라는 개인으로부터 탈출해 공동체 일원이 된다. 이 과정이 ‘엑스터시(ecstasy)’다. 즉 자신의 현재 상태(-stasy)로부터 밖으로(ec-) 빠져나오는 황홀경(恍惚境)을 체험한다.
서사시(敍事詩)와 비극(悲劇)
기원전 5세기, 아테네는 두 가지를 이용해 대중을 교육시켰다. 서사시와 비극이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비극으로 대표되는 창작의 기본구조와 성격을 규정한 《시학(詩學)》 26장에서 서사시와 비극을 비교한다. 둘 다 이야기를 매개로 의미를 전달한다. 둘 중 무엇이 더 우수한 예술형식인가? 그는 그리스의 대표적 서사시인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와 비극시인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을 비교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서사시는 가지고 있으나 비극이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은 없습니다. 비극은 심지어 (서사시 형식인) 장단단육보격(長短短六步格) 형식을 사용합니다.”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와 《오디세우스》는 기원전 750년부터 고대 그리스 사회에서 서사시로 공동체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이야기의 보루였다. 한 행은 여섯 음절로 구성돼 있고, 그 모음의 길이는 장단단으로 이뤄져 이야기를 말하는 사람이나 이야기를 듣는 사람이나 서로 소통하고 기억하기에 용이하다. 음유시인이 이전부터 전승돼 내려온 이야기를, 그것을 듣고자 하는 공동체 구성원들에게 일방적으로 들려주는 방식이다.
기원전 5세기에 이야기 전달 방식의 새로운 스타일인 비극이 등장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말한다. “비극은 많은 부분을 무대장치와 음악에 할애해 쾌락을 더욱 생생하게 표현합니다. 이 생생함은 대사나 행위를 통해 관객에게 느껴집니다. 비극은 자신이 표현하려는 이야기의 재현을 제한된 공간에서 성취합니다. 그 쾌락은 (서사시처럼) 장시간에 걸쳐 희석되지 않고 좀 더 집중돼 강화됩니다. 상상해 보십시오.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렉스》를 《일리아스》와 같이 많은 행으로 늘린다고!”
호모사피엔스사피엔스의 동굴 속 의례는 지상으로 옮겨져 처음에는 서사시 형태로 시작했다. 서사시는 가족 중심, 혈연 중심, 혹은 지역 중심의 오래된 소통 방식이다. 수직적이며 일방적인 방식을 통해 전달되는 서사시는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도시의 소통 방식으로는 부족했다. 이야기가 수평적이며 상호보완적인 방식으로 거듭나기 위해 무대장치와 의상, 그리고 음악을 동반한 비극이 등장했다. 공동의 이익과 안녕을 위해 도시라는 제한된 공간에서 거주하는 아테네 시민들은 비극이란 새로운 이야기 장르를 고안해 냈다. 종합예술인 비극은 시와 음악, 춤과 웅변, 무대장치와 무대의상으로 원형극장에 모인 아테네 시민들의 눈과 귀뿐만 아니라 그들의 마음도 자극했다.
뮈토스(mythos)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은 그리스 비극의 최고봉으로 평가받는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작품이 비극을 가장 이상적인 방식으로 완성하기 위해 필요한 구성 요소들을 가장 찬란하고도 정갈하게 전개했다고 주장한다. 이 모델은 후에 등장하는 모든 비극과 연극 공연의 문법이 됐다. 이 구성 방식은 관객들이 엑스터시를 경험하는 데 가장 경제적인 방식이다. 이 구성을 고대 그리스어로 ‘뮈토스(mythos)’라고 부른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에서 뮈토스를 ‘등장인물(에토스·ethos)’보다 중요한 요소로 평가한다. 뮈토스는 시작과 중간, 그리고 끝으로 이뤄진다. ‘시작-중간-끝’은 서로 연결돼야 하며 서로가 유기적으로 필요해야 하고 기능해야 한다. 뮈토스는 관객들이 무대에서 펼쳐지는 비극에 몰입해 ‘공포’와 ‘연민’을 느끼기 위해 필요한 이야기를 감동적으로 만드는 정신적이며 영적인 DNA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내 삶의 핵심을 담아낼 뮈토스다. 뮈토스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연결성과 일관성이다.
그리스 비극의 외형적인 구성은 크게 시작-중간-끝으로 전개된다. 시작에 해당하는 부분이 ①입장가(入場歌), 그리스어로는 프롤로고스(prologos)다. 비극의 첫 부분으로 합창대(코러스)가 오케스트라(무대와 객석 사이의 원형 또는 반원형 공간)로 등장하기 전에 가면을 쓴 배우(신이나 인간)가 나와 비극의 전체 주제와 상황을 설명한다. 중간은 세 부분 즉 ②등장가(登場歌·그리스어 파로도스(parodos))와 ③삽화(揷話·그리스어 에페이소디온(epeisodion))와 ④정립가(停立歌·그리스어 스타시몬(stasimon))로 구분된다. 등장가는 합창대가 오케스트라로 가면서 부르는 노래이며 삽화는 그 노래들 사이에 나누는 대화들이다. 정립가는 합창대가 한 곳에 서서 좌우로 움직이면서 부르는 노래로, 이전 노래에 대한 성찰이다. 끝에 해당하는 부분이 ⑤퇴장가(退場歌·그리스어 엑소도스(exodos))로, 합창대가 오케스트라를 떠나며 부르는 노래다.
《오이디푸스 왕》의 내적인 구성인 뮈토스는 기원전 5세기 아테네인이라면 한 번쯤은 들은 적이 있는 오래된 신화를 기반으로 만들어졌다. 신화로만 존재해온 오래된 이야기가 소포클레스의 상상력을 통해 비극이란 새로운 이야기로 탄생했다. 오이디푸스는 한 공동체의 일원이라면 반드시 지켜야 하는 두 가지 ‘터부(taboo)’를 위반했다. 한 가지 터부는 자신의 생부를 살해한 것이고, 또 다른 터부는 자신의 생모를 아내로 맞이해 네 명의 자녀를 둔 것이다.
당시 대부분의 작가들은 반(反)공동체적이고 반사회적인 오이디푸스의 끔찍한 행위에 집중했을 것이다. 그러나 소포클레스의 관심은 달랐다. 그가 집중한 것은 오이디푸스가 자신의 운명에 관한 진실을 발견하는 순간이었다. 소포클레스는 이 진실을 깨닫는 순간을 호메로스처럼 신의 개입이나 우연으로 설명하지 않는다.
오이디푸스는 자신에 대한 진실을 스스로의 힘으로 처절하면서도 용맹스럽게 밝혀낸다. 《오이디푸스 왕》의 주인공은 결국 자기 자신을 파괴하는 자다. 그는 셜록 홈스처럼 범인이 남긴 퍼즐을 추적하고 조합한다. 그가 발견한 범인은 바로 자기 자신이다. 오이디푸스는 아테네 민주주의를 실험하기 위해 반드시 살해해야 하는 희생양이 됐다. 그리스 민주주의는 자신의 터부를 샅샅이 찾아내고 걷어내는 과정에서 시작했다. 소포클레스는 이 과정을 《오이디푸스 왕》이란 비극을 통해 우리에게 호소한다. “당신이 걷어내야 할 터부는 무엇입니까?”
배철현 < 서울대 종교학과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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