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 이름은
[ 심성미 기자 ]
《82년생 김지영》은 한국 사회에 지워지지 않을 선을 그은 소설이다. 선이 그어지기 전과 후는 결코 같지 않다. 판매부수 70만 부를 넘어선 이 소설은 많은 여성에게 ‘때로 불편했지만 대수롭지 않게 여겨왔던 일들이 뿌리 깊은 차별에서 기인한 것이었다’는 사실을 일깨웠다. 여성인권 신장이라는 시대적 화두와 맞물린 이 책은 사회에 ‘페미니즘 광풍’을 불러일으켰다.
조남주 작가(사진)의 신간 단편소설집 《그녀 이름은》은 《82년생 김지영》의 변주다. 변함없이 ‘한국에서 여성으로 살아간다는 것’에 대해 얘기한다는 점에서다. 차이점이 있다면 《82년생…》이 한 여성의 일대기를 종(縱)으로 그렸다면 《그녀 이름은》은 다양한 여성의 이야기를 횡(橫)으로 잘라 보여주고 있다는 것. 조 작가는 아홉 살 초등학생부터 79세 노인에 이르기까지 60여 명의 여성을 인터뷰하고, 그들의 이야기를 소설로 각색했다. “내가 겪은 일은 별일도 아닌데”라며 꺼냈다던, 조 작가의 글로 비로소 목소리를 찾은 28편의 이야기는 분명 흔한 일이지만 ‘별일’인 얘기들이다.
소설 속 첫 번째 단편인 ‘두 번째 사람’은 상사의 성폭력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싸우다 마지막으로 폭로라는 방법을 택한 공기업 직원 ‘소진’의 투쟁기다. 《82년생…》의 주인공은 사회의 편견에 항거하지 못하고 무너졌지만 이번 소설에서 저자는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들과 맞서 싸우기를 택하는 장면도 인상적이다. ‘결혼일기’와 ‘이혼일기’는 결혼이라는 제도 안에서 출산·양육·가사를 강요받는 두 자매에 대한 얘기다. 결혼식 드레스부터 신혼집 커튼색을 참견하고, 직장 생활을 하는 며느리에게 “왜 아들에게 배달 반찬을 먹이냐. 앞으로 내가 해주겠다”며 음식을 쓰레기통에 버리는 시어머니, 이를 방조하는 남편의 모습이 그려진다. 지금도 수많은 가정에서 비슷한 모습이 펼쳐지고 있기에 “결혼해도 누구의 아내, 누구의 며느리, 누구의 엄마가 되려고 하지 말고 너로 살아”라는 동생을 향한 언니의 충고는 덧없이 느껴진다.
‘진명 아빠에게’는 두 남매를 모두 시집보낸 뒤에도 손주 세 명을 대신 맡아 키워야 하는 할머니의 이야기다. 여성끼리만 대물림되는 가사와 육아 노동의 고통, 한 번도 제대로 ‘나’의 이름을 찾지 못한 여성의 목소리가 덤덤히 들려온다. “울 아버지 딸, 당신 아내, 애들 엄마, 그리고 다시 수빈이 할머니가 됐어. 내 인생은 어디에 있을까.”(201쪽)
《82년생…》의 성공 후 일부 비평가는 조 작가의 작품을 향해 문학성이 아쉽다고 비판한다. 그러나 꼭 유려한 문장을 늘어놓아야만 좋은 문학인 것은 아니다. 현실에 발붙이고 있는 그의 작품들은 의미있는 사회적 변화를 만들어내며 ‘문학만이 가진 힘’을 여실히 보여줬다. 이번 신작 역시 그렇다. (조남주 지음, 다산책방, 276쪽, 1만4500원)
심성미 기자 smshim@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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