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재윤의 '역지사지 中國' (16)] 앞에선 지적 않고 뒤에서 놀린다

입력 2018-05-28 17:56
류재윤 < 한국콜마 고문 >


유머 하나. 미국, 일본, 중국의 군대가 있다. 지휘관이 “돌격 앞으로”를 명령했는데 아뿔싸 바로 앞에 큰 늪이 있다. 각국 군대의 예상되는 반응은 어떨까? 미국 부대원들은 멈춰 서서 지휘관에게 현황을 보고한다. 일본군은 빠질 것을 알면서도 명령을 따른다. 그렇다면 중국 군대는 어떻게 할까? 동양인은 집단주의니까 일본처럼 무조건 복종하다가 위험에 처할 것인가. 아니면 오히려 개인주의 성향이 강한 중국인들이므로 ‘명령을 어기고’ 멈춰 설 것인가. 집단주의와 개인주의라는 이원론(二元論)만으로는 예측이 불가능하다. 정답은 ‘제자리걸음을 한다’이다. 자신을 희생해 가면서까지 명령을 따르지는 않을 것이지만, 상관의 명령을 대놓고 무시하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이 유머 속 중국 군대의 행동에 대해 세 가지로 해석을 해본다. 우선은 중국인들의 ‘變通(변통·융통성)’을 말해준다. 模兩可(모릉양가: 이도 저도 다 된다) 식의 애매한 태도를 중국인들은 매우 선호한다. 어리석으면 무시당하고, 명쾌하게 말하면 누군가를 다치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중국에서도 애매(糊理糊塗·호리호도)함 또는 어리석음은 미덕이 아니지만, ‘어리석은 척’은 처세의 높은 경지이기도 하다.

"자신이 보고해 밉보일 이유 없다"

두 번째는 체면에 대한 고려다. 공개적으로 상사에게 “늪이 있으니 명령을 재고해 달라”는 말을 못 꺼낸다. 앞에 있는 위험을 누구나 다 아는데, 굳이 내가 보고해서 밉보일 이유가 없다. 事不關己高高起(사불관기고고과기: 나랑 상관없으면, 높이 걸어 놓고 상관 안 한다)다. 세 번째는 바로 권위관의 차이다. 제자리걸음은 기발하지만 조롱기가 있다. 중국인들은 권위에 대해 때로는 滑稽(골계·익살맞다)적으로 대응하는 경향이 있다. ‘권위는 무서워하지만, 존중하지 않는다’는 금언을 명심하자. 조직의 규정 또는 상사에게 늘 공손하게 대하는 직원이 있다면 그는 어쩌면 동료에게는 겁이 많다는 평을 받을지도 모른다. 혹은 阿諛奉承(아유봉승: 아첨하며 굽실거리다)이라는 비난을 받을 수 있다. 한국 기업이 중국에서 보여주는 ‘의전’에 대해서, 중국인들이 매우 거북스러워하는 이유 중 하나다.

이번 칼럼에서는 위에서 소개한 세 번째, 즉 때로는 ‘권위를 조롱’하는 모습으로 비춰지는 경우를 소개해 본다. 중국 남자들에게서 형형색색의 모자는 볼 수 있지만 녹색모자는 볼 수 없다. 중국에서는 녹색모자를 쓰면 “내 부인이 바람났다”는 의미다. 모 합자회사의 한국인 공장장이 회사 전 직원이 참가한 야외활동에 녹색모자를 쓰고 참석했다. 종일 쓰고 다녔는데, 아무도 얘기해주는 사람이 없었다. 귀국 후에 알고 나서는 당시 뒤에서 낄낄거리고 웃었을 중국 직원들에게 속은 것 같아서 매우 불쾌했다. 한국인들은 녹색모자의 의미를 몰라서 어쩔 수 없었다 하더라도, 중국인 스태프조차 알려준 이가 없었다. 쉽게 바로잡을 수 있는 실수였는데 당시 아무도 지적해주지 않아서 큰 망신을 당했다고 여겼다.

비슷한 일들이 중국에서는 빈번히 발생한다. 이런 행위에는 중국식 체면관 외에 중국인의 권위관도 작용했다. 권위 있는 이를 무서워해서, 굳이 내가 나서서 ‘지적’하지 않는다. 그리고 뒤에서는 얘깃거리로 삼는다. 권위가 조롱당하고, 권위는 점점 약해진다. 권위가 무서워 말은 못하는데, 결국은 권위가 우스워지게 된다. 중국 내 한국 기업에서 이런 상황이 반복적으로 발생한다. 오래 근무한 직원 중 회사에 대한 충성심은 줄어들고 (회사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조롱’을 즐기는 이들이 적지 않다.

권위, 직위만으론 통제 못해

독수리 앞에서는 “나는 들짐승입니다”, 사자 앞에서는 “나는 날짐승입니다”라며 변명한 박쥐 얘기는 한·중 양국이 다 알지만 해석은 다르다. 한국에서는 ‘배신’을 본다. 중국인들은 박쥐로부터 ‘융통성’을 배운다. 중국 내 한국 기업들이 갈수록 위신을 잃어가고 시간이 지날수록 오히려 조직이 단단해지지 않는다면, 중국인의 권위관 차이를 인식하고 방법을 찾아야 한다.

권위, 직위만으로는 통제가 안 된다. 실력을 갖춰야 한다. 현지인들과 더 넓고 깊은 관계를 맺어가야 한다. 형식적인-한국 사람에게 보여주기 위한-인맥이 아니라 상호 신뢰하며 솔직히 소통할 수 있는 관계를 만들어 가야 한다. 역시 틈나는 대로 공부해야 한다. 중국의 조직문화에 대해, 화교권과 중국인이 소개한 책들이 적지 않다. 경험할 때마다 “아! 그 말이 그 말이구나!” 하는 내용도 있고, 중국인들이 보지 못하는, 우리 시각으로만 보이는 것도 있다.

또 하나는 중국인과의 대화를 늘리는 것이다. 시간 타령은 한국인끼리의 식사를 줄이면 당장 해결된다. 중국어 실력이 돼서 대화하는 게 아니라, 대화하다 보면 중국어 실력이 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