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는 셰프' 박찬일의 세계음식 이야기 - 이탈리아 와이너리 투어
'PLEASE DON'T CALL IT REGULAR'
바롤로의 대표적 브랜드 피오 체사레는
레귤러라는 말을 쓰지 않아 라벨에
이런 문구를 새겼다
국가 최고 등급 바롤로는
'3년 숙성'을 法으로 정해
반드시 2년은 오크나
다른 나무통에서 숙성한다
"눈에 보이면 사라!"… 파올로 스카비노 '브릭 델 피아삭'
파커 포인트 100점… '카사노바 디 네리' 2010년 빈티지
와인 산지로 투어를 떠나는 사람이 많아졌다. 예전, 프랑스와 이탈리아 같은 이른바 종주국의 산지에서 한국인을 찾는 일은 상당히 어려웠다. 동양인은 대개 일본인이었다. 이제는 프랑스 보르도 투어에 개인적으로 참여하거나 이탈리아에서 렌트한 차로 산지를 둘러보는 한국인 여행객을 꽤 흔히 볼 수 있다. 이탈리아 와인 투어는 대개 두 지역으로 나뉜다. 피에몬테와 토스카나다. 피에몬테는 그 이름(pied+monte)의 라틴어 어원에서 알 수 있듯이 산의 발, 즉 ‘알프스의 밑’이라는 뜻이다. 프랑스 나폴레옹 군대가 이 일대를 지나가며 전투를 치렀고, 통일 이탈리아의 근거지로 명성을 갖고 있다. 통일(1861년) 전에는 사보이 왕국이 있던 지역으로 프랑스 문화의 지배력에 있었던 곳이기도 하다. 이곳이 유명한 것은 주도(州都) 토리노(튜린Turin) 올림픽에서 화려하게 은메달을 땄던 김연아 때문이다. 물론 농담이다(김연아가 토리노에서 세계적 명성을 얻은 건 사실이다).
‘와인의 왕’으로 불리는 피에몬테의 바롤로
밀라노 말펜사 공항에 도착해서 피에몬테의 주요 와인 산지인 알바(Alba, 토리노에서 남쪽으로 1시간 거리에 있다) 지역까지는 육로로 두 시간이 채 걸리지 않는다. 한국인들도 대개는 토리노 공항 대신 이 루트를 이용한다. 이동하면서 이탈리아에서 가장 긴 포강과 그 유역에서 자라는 벼를 볼 수 있다. 내가 방문했던 시기는 아직 모내기 전이라 벼를 볼 수 없었다. 이 육로는 드라이브하기 상당히 좋다. 길이 잘 닦여 있으며 무엇보다 경관이 최고다. 밀라노-토리노(알바) 라인은 우측, 반대 라인은 왼쪽이 유리하다. 바로 알프스의 연봉(連峰)이 보이기 때문이다. 머리에 눈을 인 연봉은 꿈처럼 펼쳐진다. 특히 저녁놀이 질 때가 압권인데, 하얀 눈을 뒤집어쓴 봉우리들이 황금색 모자로 갈아 쓰기 시작하는 시간대다. 절로 탄성이 나온다.
피에몬테는 피아트 자동차 회사를 비롯한 공업도 활발하고 무엇보다 농업 생산물의 인기가 높다. 질 좋은 치즈, 요리가 피에몬테의 자랑이다. 그중에서 와인은 가장 높은 자리에 있다. 피에몬테 와인은 오랫동안 이탈리아 와인이 국제시장에서 저가의 이미지를 벗지 못하던 때(1980년대까지)에도 유아독존, 고급 와인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바롤로(Barolo) 때문이다. 바롤로는 와인의 왕, 왕의 와인이라는 별칭으로 부른다. 보통 고급 와인을 따지는 척도 중에서 장기 숙성력을 보는데, 바롤로는 명가가 생산한 것은 1940년대, 1960년대 제품을 개봉해도 탄탄한 힘과 기품을 아직도 보여준다. 물론 바롤로가 지금처럼 비싸게 거래된 것은 2000년대 이후의 일이다. 1990년대 초반만 해도 여전히 ‘살 만한 가격대’의 와인, 즉 한국식으로 말하면 가성비 좋은 와인이었다. 물론 지금도 그런 이미지와 가치는 여전하다.
바롤로는 특이하게도 네비올로 단일 품종으로 생산한다. 네비올로란 이탈리아어로 안개를 뜻하는 네비아(nebbia)에서 왔다고 한다. 과연 피에몬테에서 첫 밤을 보낸 새벽, 시차 때문에 잠을 깨어 밖으로 나서자 짙은 안개 속에 검푸른 포도밭이 어슴푸레 보였다. 네비올로는 아주 예민한 품종이다. 그래서 바롤로의 가치가 유지되고 있기도 하다. 네비올로를 다른 지방이나 국가에서 심어서 성공한 예가 드물다. 피에몬테의 한정된 땅에서 생산한 바롤로가 더욱 영광을 얻어가는 것도 이런 배경이 있어서다. 바롤로는 아주 싼 것은 10만원(이하 국내 소비자가격 기준)에서 보통 15만~20만원 선에서 팔린다. 뛰어난 제품은 100만원이 넘는 것도 흔하다.
바롤로 와인은 한 마을에서 생산되는 것이 아니라 알바를 중심으로 한 11개의 마을에서 생산된다. 라 모라, 바롤로, 세라룽가 달바(Serralunga d’Alba), 몬포르테 달바(Monforte d’Alba), 카스틸리오네 팔레토(Castiglione Falleto) 5개 마을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마을마다 타닌의 강도와 부드러움, 세밀한 향과 밀도의 차이를 지니고 있어서 생산자는 블렌딩하는 어려움이 있다. 또는 아예 싱글 빈야드라고 하는 독립적인 작은 밭에서 나는 네비올로로만 생산하는 와인이 있다. 이런 다채로운 바롤로를 비교하고 맛보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다.
우아하고 세련된 바롤로의 명성
바롤로는 ‘이탈리아 와인의 왕’이라 부른다고 했는데, 국가 등급에서도 최고이며 병당 평균 가격에서도 당연히 이탈리아 톱이고 국제시장 가격에서도 최상위에 랭크된다. 2010년까지 법률 기준으로는 출시 전에 3년의 숙성을 거쳐야 시장에 낼 수 있으며, 그중 2년은 반드시 오크나 다른 나무통 숙성을 해야 한다. 리제르바(riserva)라고 이름 붙은 것은 62개월의 숙성 기간이 필요한데, 모든 와이너리가 리제르바를 생산하는 것은 아니다. 피오 체사레 브랜드 같은 경우는 아주 오래 숙성한 것도 따로 리제르바라고 이름붙이지 않는다. 자신들 와인에 대한 자부심의 표현이랄까.
이번에 방문한 와이너리는 바롤로 중에서도 바롤로라고 하는 페오 체사(Pio Cesare)가문이었다. 피오 체사레 와이너리는 1881년 설립 이후 피에몬테 와인의 핵으로 유명하다. 체사레 피오가 설립해 현재 5대에 이어 가족 경영으로만 와인을 생산한다. 한국에서는 부티크 와인을 많이 다루는 씨에스알와인사와 독점 계약을 맺고 수입 판매되고 있다.
현장에서 이들의 와인을 시음했다. 역시 명성은 하루아침에 이뤄지지 않는다. 힘과 섬세함, 바롤로다운 개성을 고루 압축한 와인을 생산하고 있었다. 대개 요즘 바롤로는 싱글 빈야드를 강조하거나, 리제르바 등으로 가격을 차별화하는 게 현지의 추세다. 그래서 레귤러(보통)나 엔트리급의 바롤로는 아무래도 품질이 최상급에 못 미치는 경우를 흔하게 볼 수 있다. 즉, 대중적(그래도 비싸긴 하다)인 바롤로와 고급 바롤로의 투 트랙 전략을 쓰는데, 피오 체사레의 경우는 레귤러라는 말을 아예 쓰지 않는다. 그래서 라벨에 ‘PLEASE DON’T CALL IT REGULAR’라는 문구를 새기고 있다. 자신들의 전통적인 바롤로에 대한 신뢰를 담은 일화라고 할 수 있다.
현재 오너는 피오 보파(Pio Boffa)다. 그는 어머니인 로지 보파(Rosy Boffa)가 체사레 피오의 유일한 손녀로 혈족 관계다.
유쾌하고 아주 정력적인 사람으로 취재팀을 맞아주었다. 현재의 유명한 바롤로의 명성은 그에 의해 이뤄졌다고 할 수 있다. 로마시대 유적이 있는 와이너리의 지하 4층에는 100년 전후의 와인이 즐비한데, 지금 개봉해도 강력한 힘과 맛을 유지하고 있다. 좋은 와인이란 결국 좋은 포도와 양조기술의 결합일 텐데, 이들의 오랜 노하우를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와이너리에서 와인을 테이스팅했다. 역시 ‘레귤러’라는 이름을 거부한다는 일반 바롤로부터 비범하다. 이들이 생산하는 와인은 기본적으로 응축력이 강해 놀라운 경험을 준다. 바르바레스코(Barbaresco)나 바르베라(Barbera) 같은 와인들도 마찬가지다. 물론 상당한 가격대를 보여준다.
화이트 와인, 가비 좋은 향과 기분 좋은 목 넘김
피오 체사레가 전통적인 권위의 클래식을 보여주고 있다면 파올로 스카비노(Paolo Scavino) 같은 와이너리는 같은 바롤로라도 다른 구조의 맛을 선사한다고 할 수 있다. 더 현대적인 설비와 프렌치 오크통으로 대변되는 국제적으로 보편적인 고급와인의 이미지를 채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1921년 피에몬테 카스틸리오네 팔레토 마을에서 로렌초 스카비노와 파올로 스카비노 부자가 함께 와이너리를 설립했고, 이후 4세대 동안 엄격한 전통을 고수했다. 1990년대 초반 엔리코 스카비노(Enrico Scavino)는 온도가 조절되는 발효조를 지역 최초로 도입한 걸로 유명하다. 현대화의 선구자였던 셈이다. 당시 바롤로가 쓰던 대형 슬로베니안 오크 캐스크 대신 작은 오크 바리크 숙성을 시도했다. 이는 바롤로가 좀 더 우아하고 세련된 맛을 보여주기 시작했다는 뜻이 된다. 일종의 혁신이었다. 파올로 스카비노 와인이 미국의 유명한 와인평론가 로버트 파커의 절찬을 받은 것도 무리가 아니다. 원래 다소 거친 풍미가 있는 바롤로에 생동감과 오크의 아취를 더한 결과를 낳았다. 스카비노 와인의 승승장구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이들의 생산 라인업 중에서 ‘브릭 델 피아삭’은 이태리 와인 중 유일하게 다섯 차례에 걸쳐 와인 스펙터(Wine Spectator)의 TOP 100에 올라간 명품 바롤로다. 국제 와인 애호가들 사이에서는 그래서 “눈에 보이면 사라!”는 말이 생겼다. 투자가치도 염두에 둔 말이다. 국내에도 소량 수입되고 있다. 30만원을 훌쩍 넘는다.
피에몬테는 바롤로와 바르바레스코, 바르베라 같은 좋은 레드와인 말고 화이트와인으로도 유명하다. 1990년대부터 국제품종인 샤르도네가 곳곳에서 심어져 인기를 구가하고 있지만 역시 전통적인 화이트의 명성이 지배적이다. 그중 하나가 바로 가비(Gavi)다. 이탈리아 화이트와인을 좋아하는 이들 중에는 가비 마니아가 있을 정도로 은근한 인기가 있다. 이 가비를 가장 뛰어나게 생산하는 가문이 바로 브롤리아(Broglia)다. 1972년 설립해 이탈리아 최고 평가지인 감베로 로소의 최고 등급인 3글라스를 가비 중에서는 유일하게 받은 바 있다. 이들이 만드는 가비 중에서도 대표주자 격인 라 메이라나(La Meirana)는 와이너리가 있는 지역의 이름에서 따온 것으로 가비 역사의 산증인 격이다. 라 메이라나는 972년 가비 지역에 대해 최초로 언급한 문서에 등장할 만큼 가비 역사와 궤를 함께 해왔다. 이 지역의 토착품종인 코르테제 100%로 만들며, 고급스러우면서도 반짝이는 생명력, 비교하기 힘든 향과 기분 좋은 목 넘김 등의 장점을 보여준다.
토스카나, 와인과 태양의 로망
앞서 이탈리아 와인은 피에몬테와 토스카나 양대 주(州)로 이뤄져 있다고 했다. 그 피에몬테가 바롤로라면 토스카나는 브루넬로 디 몬탈치노(Brunello di Montalcino)다. 단연코 그렇다. 흥미로운 건 이 고급 와인이 바로 우리가 토스카나산으로 가장 많이 마시는 레드와인 키안티와 같은 품종(산 지오베제)을 쓴다는 사실이다. 보통 더 굵은 산 지오베제란 뜻으로 그로소라는 이탈리아어를 쓰기도 하지만 개량 육종된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 속성은 산 지오베제다. 이 품종은 고급부터 대중적인 와인을 고루 만들 수 있는데, 브루넬로 지역에서는 최상급의 와인을 주로 생산한다. 그래서 세계의 와인 애호가들은 바롤로와 브루넬로 디 몬탈치노를 비견하고 있다.
이 몬탈치노 와인 중에서도 주목할 와이너리가 있다. 세련되며 고상하고 급진적인 와이너리, 바로 카사노바 디 네리(Casanova di Neri)다. 지역에서 비교적 역사가 짧은 생산자로 1971년 지오반니 네리가 와이너리를 설립한 뒤 1978 첫 빈티지를 생산했다. 몇 백년이 흔한 이탈리아에서는 아주 짧은 역사다. 그러나 놀라운 건 2001년 빈티지였다. 미국의 저명한 와인잡지 와인 스펙터에서 100점으로 1위를 차지해버린 것. 2010년 빈티지는 로버트 파커 포인트 100점을 기록했다. 한마디로 엄청나게 떴다. 역시 이 무렵 생산된 것들은 “보이면 사라!”가 적용되는 와이너리다.
이 와이너리 와인 중에서 가장 유명한(한국에도 애호가가 많다) 건 테누타 누오바(Tenuta Nuova). 2대손인 지아코모 네리가 발견한 곳으로 그 누구도 와인을 생산할 수 있을 것이라 믿지 않았던 토양에 산 지오베제를 심어 이 믿을 수 없는 와인을 만들어냈다. 현지 와이너리에서 직접 구매할 수도 있다. 기왕이면 두 병들이(1.5L)인 매그넘을 살 것! 보관해두면 레귤러 사이즈보다 훨씬 더 값이 뛴다.
취재팀은 마지막 일정으로 키안티 클라시코의 명가를 찾았다. 토스카나를 대표하는 건 역시 ‘검은 수탉’ 문장을 쓰는 키안티 클라시코가 아닌가. 보통 한국에서 5만원대에서 출발해 20만원대까지 이르는 넓은 가격대의 와인이다. 그만큼 품질도 차이가 크다. 로카 디 몬테그로시(Rocca di Montegrossi)는 학자 풍모에 신사적인 멋을 지닌 소유주 마르코 리카솔리가 지휘한다. 이 가문은 놀랍게도 1400여 년간 와인을 만들어왔다. 한반도 통일신라 초기에 해당되는 시기다. 당시 유럽은 빈번한 영토 싸움으로 피폐해져 있었고, 리카솔리 가문의 사람들이 마을을 수호하는 데 큰 역할을 맡으며 주민들에게 신망을 얻었다고 한다.
와이너리가 있는 몬티(Monti) 지역은 ‘키안티의 그랑 크뤼 밭’이라 불릴 만큼 양질의 포도가 생산되는 곳. 로카 디 몬테그로시는 친환경 농법으로 와인을 생산하고 있다. 제공된 와인 중에서 먼저 로제와인(이탈리아에선 로사토라고 부른다)이 입에 확 붙는다. 보통 이탈리아에서는 많이 만들지 않는 와인이다. 경쾌하고 기분 좋은 질감과 개운한 향이 충만하다. 음식과 함께 먹기에 이처럼 좋은 와인도 드물 것 같다. 물론 이 와이너리에서 가장 높은 자리에 있는 키안티 클라시코 와인 로카 산 메르첼리노(Rocca San Mercellino)도 빠질 수 없다. 고기 요리에 이처럼 좋은 하모니를 주는 와인도 드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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