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호무역 장벽은 높아지는데
분쟁 조정 외엔 실종된 통상정책
강력한 규제혁파 행보로
서비스업의 고급화·수출화에 주력
새 일자리 혁명의 비전 제시해야"
최병일 < 이화여대 교수·경제학 >
“문재인 정부의 뚜렷한 통상정책이 안 보인다.” 문재인 정부 출범 1년의 평가와 전망을 논의하는 한 세미나에서 쏟아진 지적이다. 물론 “분쟁 조정 수준 외에는 소극적으로 임하고 있는데, 스마트한 선택인 것 같다. 합리적이라고 평가한다”는 주장도 나왔다. 지난 세월 대한민국의 통상정책은 자유무역협정(FTA) 체결 일변도였는데 그 역작용에 대한 우려 때문이 아니겠는가 하는 논지였다.
미국발(發), 중국발 보호주의에 대한 경계경보가 요란하게 울리는 상황에서, 촛불 힘으로 집권한 문재인 정부는 처음부터 그 경보의 심각성을 외면해왔다. 오늘의 대한민국을 가능케 한 무역의 근본 틀이 붕괴되고 있는데도 이와 관련한 대선 공약은 너무 초라했다.
최대 무역 상대국인 중국의 전방위적 사드(고고도 미사일방어체계) 보복에 제대로 된 항의 한 번 못하고 저자세로 일관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폐기 압박 속에 가까스로 한·미 FTA를 지켜내기는 했지만, 냉전시대 유산인 무역확장법의 안보조항을 핑계로 미국이 한국의 주력 수출품인 철강에 투하한 25% 관세폭탄은 70% 쿼터로 바뀌었을 뿐이다. 다자통상체제의 최대 수혜자였던 한국은 다자체제를 붕괴시키는 중국 위압에 굴복하고, 다자체제의 근간을 흔들어대는 미국과는 다른 어떤 국가보다도 먼저 다자체제에 위반되는 합의를 했다.
거센 바람이 불 때는 그저 바람이 지나가기만을 기다리는 것이 상책이라는 판단에서였을까. 이 바람은 계속될 것이고, 더 거센 바람이 불어온다는 예보가 있는데도 이런 방책이 통할까. 어쨌든 중국의 사드 보복은 끝나가고 한·미 FTA는 지켜냈으니 나름의 성과가 있다고 자위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문재인 정부가 보여준 전략과 실력으로는 보호주의 광풍을 뚫고 가기가 쉽지 않겠다는 것이 그날 세미나에서 전문가들이 내린 판단이다. 문재인 정부가 적극적인 통상정책을 하지 않는 것이 “합리적”이라는 평가에 대해서는, “정권에는 합리적일지 모르지만 국민에게도 합리적이냐”는 반문이 돌아왔다.
중국의 사드 보복은 끝난 게 아니다. 중국은 이 기회에 한국에 학습효과의 기억을 단단히 남기려고 한다. 그간 한국 기업들이 입은 손실은 어떻게 할 것인가. 중국과 거래하는 한국 기업들은 과연 중국의 장벽에 부딪혀 괴로움을 당할 때 한국 정부에 의지할 수 있을까. 저자세 통상외교로는 제2의 사드 사태를 감당할 수 없다.
미국의 철강 25% 관세 폭탄을 쿼터로 교환하면서 ‘불확실성’을 제거했다고 하지만, 쿼터 적용 시점에 대해서는 정부와 기업 간에 정확한 정보 교환이 없었다. 미국이 안보를 이유로 자동차에 관세 폭탄을 투하한다면 한·미 FTA에서 애써 확보한 관세 면제는 여전히 무사할 것인가. 한·미 FTA를 지켜냈지만 불확실성은 여전하다. 제2의 철강 사태는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이쯤 되면, “기업을 위한 국가는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라는 기업인들의 푸념은 엄살이 아니다. 기존 통상질서가 무너지는 상황에서 한국처럼 대외의존도가 높은 국가는 자력갱생과 연계강화라는 두 가지 방책을 동시에 구사해야 한다. 그 두 가지 모두 보이지 않는다.
문재인 정부 통상정책의 최대 미스터리는 통상을 일자리 창출과 연계하려는 전략이 안 보인다는 것이다. 일자리 창출을 최대 국정과제로 내세우는 정부이기에 이해하기 어렵다. 적폐라고 몰아세우는 대기업, 일자리 창출효과가 미약해진 제조업 중심 수출 패러다임, 이 둘이 문재인 정부에서 통상정책의 핵심 수단이 되고 있다는 것은 구태의연하다. 이런 방식으로는 보호주의의 거센 바람을 헤쳐 나갈 수 없다.
전자제품, 반도체, 철강, 선박을 더 많이 수출하는 통상정책을 답습한다면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계속 경기하겠다는 것이다. 서비스업을 고급화하고 수출화하는 전략을 통해 일자리 혁명의 블루오션으로 만드는 비전을 세워야 한다. 우리의 세계적인 정보기술(IT) 기반과 4차 산업혁명 기회를 활용하면 그 가능성은 실현의 영역으로 들어올 것이다. 문제는 여기저기 뿌리내린 강력한 규제를 극복하는 일이다. 70%를 넘는 국정 지지도라면 충분히 시도해 볼 만하다. 그 정치적 자산은 국민을 위해 써야 하지 않겠나. “이게 나라다”라고 제대로 보여주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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