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와 구글 등에서 활동하는 인공지능(AI) 전문가와 컴퓨터 과학도 2964명이 국제학술지 네이처의 자매지 ‘네이처 머신 인텔리전스’를 상대로 보이콧을 전격 선언했다. 이들은 과학 전문 학술출판사인 스프링거 네이처사가 AI 관련 논문에 대한 자유로운 접근권을 허용하지 않을 경우 내년 1월 첫 출간할 AI 전문지 네이처 머신 인텔리전스에 대한 논문 투고는 물론 논문 심사와 편집 참여를 모두 거부하겠다고 선언했다. 지난 4월 AI 연구자들이 AI의 무기화를 반대하는 보이콧 선언하기도 했지만 특정 학술지를 상대로 전면 보이콧 선언을 한 건 이례적인 일이다.
○삼성 네이버 구글 연구자 참여
서명에 참여한 전문가들은 “머신러닝(기계학습)은 공동체적 정신에 입각한 자유롭고 개방된 환경에서 연구를 해왔다”며 “논문 접근을 제한하고 논문 게재비를 요구하는 행위는 앞으로 이 분야 연구에서 어떤 역할도 없으며 새 저널 역시 시대에 역행한다고 믿는”고 주장했다.
이번 보이콧 서명은 지난해 11월 출판사 측이 로봇과 인공지능 연구를 다루는 새로운 학술지를 창간하겠다고 발표한 직후 시작됐다. 한국에선 김진형 인공지능연구원장(KAIST 명예교수)를 비롯해 삼성종합기술원, 네이버, 연세대, KAIST 등 국내 대학과 대기업, 벤처기업 연구자와 컴퓨터 전공 박사 과정 대학원생, 정준영 구글딥마인드 연구원 등 해외에 적을 둔 한국 연구자 등 16명이 참여했다. 바둑 AI 알파고를 개발한 구글의 딥마인드 연구자를 포함해 구글 본사 및 해외 지사 연구원 100명도 뜻을 모았다. 김 원장은 “AI 기술이 빠르게 발전하면서 다른 과학처럼 재현성 검증은 중요한 문제로 떠올랐다”며 “논문과 소스코드, 데이터를 공개해야 연구 성과를 제대로 검증하고 산업 분야에서 빠르게 활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AI 분야 연구에선 데이터와 소스코드를 투명하게 공개하는 것을 통해 이를 바탕으로 새로운 기술이 개발되는 것이 세계적인 추세로 자리잡고 있다. AI가 기반을 둔 컴퓨터 과학은 해커처럼 반항적이고 저항적인 문화를 기반으로 성장을 이어왔다. 자유롭게 지식을 공유하고 그 과정에서 나타나는 독창적 아이디어를 검증받는 풍토에서 빠르게 발전을 이뤄왔다는 설명이다. 실제 온라인 상에서 컴퓨터 과학자가 개발한 AI 알고리즘을 수학자가 보고 오류를 지적하고 이를 고치기 위한 아이디어를 공유하는 일은 다반사가 됐다. 이런 상황에서 구독료를 내는 기관과 과학자에게만 논문을 제한해서 공개하는 출판사의 전통적인 출판 정책이 AI 발전을 저해할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연구자들은 유료 학술지 불매 운동을 벌이는 한편 구독료가 들지 않고 누구나 논문에 접근할 수 있는 아카이브엑스 같은 오픈엑세스 사이트로 눈을 돌리고 있다.
실제 2001년에는 학술지 ‘머신러닝저널’ 편집위원 전원이 사퇴 선언을 하고 무료로 논문에 접근하는 오픈액세스 저널인 머신러닝연구저널(JMLR)을 출판한 일도 생겼다. 이번 보이콧을 주도한 토머스 디트리히 미국 오리건주립대 교수는 “빠르게 발전하고 있고 큰 이익과 큰 해를 끼칠 수 있는 AI의 잠재력을 고려하면 개방적인 풍토가 필요하다”며 “출판사들이 돈의 장벽 뒤로 연구 논문을 숨기는 것은 더 많은 과학자들의 검증을 어렵게 할 것”이라고 말했다.
○오픈액세스, 진짜 가치있는 논문 발굴에 유리
스프링거 네이처측은 대변인 성명을 통해 현재로선 저널 출판 계획을 철회할 뜻이 없음을 밝혔다.
AI 논문은 폭발적으로 늘고 있다. 학술정보 데이터베이스인 스코푸스에 따르면 AI 논문은 1996년 이후 10배나 늘었다. 얀 르쿤 페이스북 AI 연구책임자는 상당수 연구자들이 학술지의 느린 검토 과정 때문에 오픈액세스로 옮겨가고 있다고 말했다. 일부에선 오픈 액세스 방식으로 공개하면 일부 저널 편집진의 편협한 평가로 중요한 의미를 담은 논문이 무시되는 일을 막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로봇과 AI 연구자이자 이번 서명에 참여한 황병훈 뉴로메카 소프트웨어개발팀장(전 대구경북과학기술원 선임연구원)은 “전통적인 저널의 경우 몇몇 평가자들과 저널 측의 시각에 따라 논문 게재가 결정되지만 오픈엑세스 방식은 해당 분야 광범위한 전문가들의 평가를 받을 수 있다는 점에서 공정한 검증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이번 서명 운동은 단순히 학술 논문의 접근성 문제에만 초점을 맞추지 않고 있다. 논문과 소스코드의 공개는 AI에 대한 막연한 환상과 두려움을 줄일 방법도 될 수 있다. 김 원장은 “AI가 발전하면서 무슨 일을 벌일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확산되고 있다”며 “누구나 볼 수 있도록 소스코드를 공개하는 방법이 있다”고 말했다.
AI가 인류 사회 전체에 미칠 파급력이 커지면서 학자들의 행동도 바빠지고 있다. 지난 4월에는 월시 호주 뉴사우스웨일스대 교수를 비롯해 서명에 참여한 29개국 57명의 AI 연구자들이 KAIST가 AI를 이용해 살상용 로봇을 개발하고 있다며 학술 협력을 중단하겠다고 성명서를 발표했다가 학교 측의 해명을 듣고 철회했다.
박근태 기자 kunta@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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