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책을 갑작스레 바꾸면 적응 과정이 필요하다. 유예기간과 특례를 두고, 가이드라인을 제시해 서서히 안착시키는 게 상례다. 하지만 정부가 내놓는 친(親)노동정책마다 완충장치 없이 강행하는 데 따른 후유증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최저임금 대폭 인상이 연초 고용시장을 강타한 데 이어, 오는 7월부터는 준비 안 된 근로시간 단축(주 52시간 근무)으로 또 한번 홍역을 치르게 생겼다.
시행을 50여 일 앞둔 산업현장은 이미 대혼란에 빠졌다. 업종·기업·근무 특성은 고려하지 않고 획일적으로 적용되는 탓이다. 한경 보도(5월9일자 A1, 4, 5면)를 보면 “나라 전체가 주 52시간제의 실험장이 됐다”는 기업의 하소연이 과장이 아니다. 단기간 집중근무가 많은 정보기술(IT) 업계는 경쟁력 저하를 우려해 R&D센터 분사(分社) 같은 편법까지 강구한다. 300인 미만 사업장은 시행이 1년 반 늦춰지기 때문이다. 게임, 건설, 회계업계 등도 사정은 같다.
기업 내 혼선도 점입가경이다. 임원 근무시간, 거래처와의 식사, 부서 회식, 해외출장 중 이동·대기시간 등의 근로시간 포함 여부가 모두 불분명한 탓이다. 오죽하면 “무조건 조심하자”는 게 대책이라고 한다. 격일제 근무인 버스업계나 사회복지시설은 인력 충원, 예산 확보가 어려워 대책도 없다.
사정이 이런데도 고용노동부가 여태 가이드라인조차 못 낸 것은 직무유기나 다름없다. ‘임금 삭감 없는 주52시간 관철’을 내건 양대 노총을 의식한 게 아니냐는 의구심마저 들게 한다. 선진국에서 보편화된 탄력근로제나 근로시간 저축계좌제 같은 개선책 논의는 4년 뒤로 미룬 국회의 무책임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노동존중’ 정책이 노동시장의 격차만 벌리는 역설에 대해 정부·여당의 심각한 성찰이 필요하다.
물론 과도한 근로를 줄여 일과 삶의 균형을 도모하자는 것을 반대할 사람은 없다. 하지만 노사가 합의해도, 근로자가 더 일하길 원해도 주 52시간이 넘으면 모두 불법으로 낙인 찍어선 곤란하다. 예외없이 무조건 따르라는 것은 정책이 아니라 강요다. 미래 먹거리를 걱정해야 할 기업들이 이런 ‘지시경제’에 에너지를 소모하며 한없이 움츠러들고 있다. 지금 대한민국의 실화(實話)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