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리포트] 뿌리째 흔들리는 이란 핵협정… 중동 '核개발 도미노' 부르나

입력 2018-05-06 18:32
되살아나는 이란 핵위기
오바마 정부때 체결한 핵협정
트럼프 "사상 최악의 협상" 비난
탄도미사일 제한·사찰 추가 요구
이란 "파기 땐 NPT 탈퇴" 맞불
사우디 "우리도 핵무기 개발"

북·미 협상에 어떤 영향?
"비핵화 적당한 타협 없다"메시지
트럼프식 제재·압박 전략에 주목


[ 이현일 기자 ] “(이란 핵협정은) 재앙이다. 체결되지 말았어야 할 끔찍하고 미친 합의다.”(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약속을 깨는 어떤 제재도 수용하지 않겠다. 어떤 방식으로든 협상은 불가능하다”(하산 로하니 이란 대통령)


이란 핵위기가 다시 고조되고 있다. 미국이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미국 영국 프랑스 중국 러시아)과 독일 등 6개국이 2015년 7월 이란과 체결한 핵협정(포괄적공동행동계획·JCPOA)은 ‘잘못된 협정’이라며 전면 개정이 안 되면 폐기하겠다고 밝혔기 때문이다. 이란이 핵 프로그램을 중단하는 대가로 이란에 대한 경제제재를 일부 완화했으나, 다시 제재하겠다는 의미다. 이란은 협정이 파기되면 핵확산금지조약(NPT)에서 탈퇴하고 핵 개발을 재개하겠다며 반발하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미국 국내법(코커-카딘법)에 따라 오는 12일까지 제재 유예기간을 연장해주지 않으면 이란 핵협정은 파기 수순으로 들어간다. 그동안 백악관은 90일마다 이란의 핵협정 준수 여부를 평가해 제재 유예를 연장해왔다. 프랑스 영국 독일 등은 이란 핵위기가 재발하는 것을 막기 위해 힘을 쏟고 있지만, 뚜렷한 해법을 찾지 못하고 있다.

이란 핵협정의 운명은 북·미 정상회담에도 영향을 미칠 것이란 점에서 관심을 모은다. 미국이 ‘핵동결 정도로 적당히 타협하지는 않겠다’는 메시지를 북한에 주고 있다는 해석이 나온다.

이란 핵협정 파국으로 가나

이란 핵협정은 버락 오바마 대통령 재임 때 미국 등 주요 6개국과 이란이 오스트리아 빈에서 체결했다. 이란이 핵 개발을 포기하는 대신 미국과 유럽연합(EU)이 이란에 대한 경제제재를 해제한다는 게 핵심이다. 그러나 트럼프 대통령은 취임하자마자 “사상 최악의 협정”이라며 “협정 개정이 안 되면 폐기해야 한다”고 말해왔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 협정이 이란의 핵 개발을 막기엔 불완전하다고 보고 있다. 협정에 따르면 이란의 우라늄 농축은 2030년까지만 금지된다. 이란의 핵 활동 중 일부에 대한 금지 조치는 2025년부터 해제한다는 내용도 들어 있다. 탄도미사일 개발과 관련해서도 허점이 많다는 게 트럼프 대통령 주장이다. 핵탄두를 장착할 수 있는 탄도미사일 개발을 금지한 유엔 안보리 결의안을 2023년까지 유지한다는 규정이 대표적이다.

이 때문에 미국은 우라늄 농축이 2030년 이후 허용되는, 이른바 ‘일몰 조항’을 없애고 탄도미사일 개발 제한을 강화하며 협정에서 명시한 핵시설 외에 이란 전역을 사찰할 수 있도록 개정할 것을 요구해왔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을 비롯해 서유럽 국가들은 협정 파기를 막기 위해 트럼프 대통령의 요구를 대폭 수용한 중재안을 내놓고 있다. 유럽이 중재에 나선 것은 협정 파기로 이란이 핵 개발을 재개하면 중동 정세가 불안해질 게 뻔한 데다 제재 해제 후 이란에 대거 진출한 유럽 기업들이 큰 피해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협정이 파기되면 에어버스가 이란과 맺은 190억달러어치 항공기 100대 판매계약과 이란 해상가스전 개발 프로젝트 등이 무산될 위험이 있다. EU와 이란의 무역은 2013년 62억유로에서 지난해 210억유로 규모로 급증했다.

“개정 협상 불가” 외치는 이란

이란은 핵 개발 중단 등의 약속을 위반하지도 않았는데 협정을 파기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그동안 “이란이 핵협정을 준수하지 않고 있다”고 줄기차게 비난해왔다.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는 최근 정보기관 모사드가 이란 테헤란에서 탈취한 서류를 보여주면서 “이란이 핵 개발을 계속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미국과 이스라엘은 그러나 이란이 협정을 위반했다는 확실한 증거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국제원자력기구(IAEA) 관계자는 “이란이 핵 프로그램 동결 약속을 이행하고 있다”며 “2009년 이후 핵무기를 개발했다는 증거는 없다”고 밝혔다.

탄도미사일 개발 제한도 이란으로서는 수용하기 어려운 요구다. 적대 관계인 이스라엘이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는 상황에서 탄도미사일 개발까지 막히면 군사적 균형이 무너질 것이라는 이유에서다. 이스라엘은 핵탄두 장착이 가능한 사거리 5000㎞의 미사일을 보유하고 있다. 사우디아라비아도 사거리 4000㎞의 미사일이 있다.

이란은 지난해 최대 사거리 2000㎞의 호람샤르 미사일을 시험발사하는 등 탄도미사일 개발을 추진하고 있다. 이스라엘과 사우디는 이 미사일의 사정권에 있다. 파이낸셜타임스는 “트럼프 대통령은 이란의 미사일 사거리를 300㎞로 제한하고 싶어 한다”고 보도했다.

북·미 협상에도 영향 미칠지 촉각

이란 핵협정 개정이냐 폐기냐를 둘러싼 줄다리기가 북·미 핵협상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도 주목된다. 일부에선 미국이 끝내 이란 핵협정을 파기한다면 북한에 잘못된 신호를 줄지 모른다는 우려가 나온다. 오바마 대통령 시절 국무부 부장관을 지낸 앤서니 블링큰은 최근 뉴욕타임스에 “트럼프 대통령이 이란 핵협정을 파기하겠다고 위협하는 것은 북한에 잘못된 메시지를 주고 협상에 대한 희망도 약화시킬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달 30일 백악관 기자회견에서 “(이란 핵협정 파기는) 북한에 올바른 메시지를 보내는 것으로 생각한다”고 강조했다. 제재와 압박을 가해 북한을 대화로 이끌어낸 트럼프 대통령이 이란에도 비슷한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미국이 협정을 파기하고 이에 맞서 이란이 핵 개발을 재개할 경우 중동이 전운에 휩싸일 것이란 점은 트럼프 대통령으로서도 고민거리다. 이스라엘은 물리력을 동원해서라도 주변 이슬람 국가의 핵 개발을 저지하기 위해 힘쓰고 있다. 이스라엘은 2007년 F-16 전투기 4대와 F-15 전투기 4대를 동원해 시리아 비밀 핵시설을 공습하기도 했다. 외교 분쟁을 감수하면서까지 제3국에서 이란 핵과학자를 암살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란의 핵 개발은 중동에 ‘핵 도미노’를 불러올 가능성도 있다. 사우디의 실질적 1인자인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는 지난 3월 미국 CBS와의 인터뷰에서 “사우디는 핵무기 보유를 원하지 않지만 이란이 핵무기를 개발한다면 우리도 최대한 신속히 같은 패를 낼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현일 기자 hiunea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