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홍성호 기자 ]
'갑질문화'도 신중하게 써야 할 말이다. '갑질'이란 단어는 아직 사전에 오르지 않았다. '갑'은 차례나 등급을 매길 때 첫째를 이르는 말이다. 여기에 접미사 '-질'을 붙여 '갑질'이란 말을 만들었다.
문화가 넘치는 시대다. 웬만한 말에 갖다 붙이면 다 ‘OO문화’가 된다. 문화는 한마디로 정의하기 어려운, 고도로 추상화된 단어다. 개념적으로도 좁은 의미에서 넓은 의미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하게 쓰인다. 그러다 보니 우리 주변에서 문화가 아닌 것을 찾기 어려울 정도가 됐다. 그렇다고 아무데나 써도 되는 말일까? 요즘 우리 사회를 흔들고 있는 ‘갑질문화’도 그런 점에서 들여다볼 만하다. 찬찬히 보면 좀 생뚱맞다는 생각이 든다.
강간문화, 조폭문화 등 아무데나 갖다 붙여
‘미투 운동’이 한창 보도될 때 일각에서 ‘강간문화’가 튀어나왔다. 영어로는 rape culture다. 우리 사회에서는 이 말이 낯설지만 영어권에서는 꽤 알려져 있는 용어다. 1970년대 미국에서 페미니스트들이 쓰기 시작해 단행본과 영화로도 많이 소개됐다. ‘강간문화’란 말은 인류역사와 강간의 사회적 환경을 조명한 학술적 개념에서 비롯됐다. 이 말을 쓰려면 조작적 정의(operational definition)가 필요하다는 뜻이다. 일상의 언어로 사용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갑질문화’도 신중하게 써야 할 말이다. ‘갑질’이란 단어는 아직 사전에 오르지 않았다. ‘갑’은 차례나 등급을 매길 때 첫째를 이르는 말이다. 여기에 접미사 ‘-질’을 붙여 ‘갑질’이란 말을 만들었다. ‘-질’은 노름질, 서방질, 싸움질 같은 데서 보듯 주로 좋지 않은 행위에 비하하는 뜻을 더해준다.
그러니 ‘갑질’은 우월적 지위에 있는 사람이 약자인 상대방을 부당하게 억압하는 행위를 가리킨다. 대통령은 이를 ‘불공정 적폐’라고 규정했다. 심하면 범죄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갑질은 횡포일 뿐 문화로는 수렴되지 않는다. 여기에 문화를 붙이는 순간 오히려 ‘갑질’의 실체는 모호해진다. 갑질의 사회적 경향을 말하고자 한다면 행태 또는 풍조, 풍토라고 하면 그만이다. 폭력이 범죄일 뿐 그 자체가 문화가 될 수 없는 이치와 같다.
학술적 개념어와 일상언어 구별해야
폭력문화니 조폭문화니 하는 말도 가끔 언론에 등장한다. 그것이 가능하다면 사기나 강도, 투기 같은 것은 강도문화, 사기문화, 투기문화가 될 수 있을까? 이런 범죄적 행위들의 존재 양식을 문화 현상의 하나로 분석할 수는 있을지언정 그 자체가 문화일 수는 없다.
학술적 개념어와 일상의 용어를 구별해 쓸 필요가 있다. 가령 아주 강력한 갑질 행태에 대해 “조폭문화 같다”라고 할 수 있는데, 이는 수사적으로 쓰인 것이다. 상징적 의미로 비유해 쓰는 말이라는 뜻이다. 어디까지나 특수한 상황에서 일시적으로 허용되는 표현일 뿐 일상의 언어로 자리 잡을 수는 없다. 글에서라면 ‘조폭문화’ 식으로 작은따옴표를 쳐서 쓰는 게 글쓰기 기법이다. 정식 단어가 아니고 조어이기 때문이다.
‘~문화’의 남용은 파괴적이고 부정적인 실체를 은폐하고 왜곡한다는 점에서 이데올로기적이기도 하다. 갑질이나 강간, 폭력, 사기, 투기, 조폭 같은 것은 범죄에 지나지 않는다. 거창하게 ‘OO문화’라고 포장해 진실을 덮거나 흐지부지 넘어가는 것은 아닌지 되돌아봐야 한다. 대부분 문맥에 따라 풍조나 풍토, 심리, 행태를 붙여 씀으로써 의미를 충분히 살릴 수 있다.
글쓰기에서는 이런 함정을 ‘과장어의 남용’이라고 한다. 뭔가 ‘그럴듯한’ 표현을 찾으려는 욕심이 ‘~문화’라는 추상적이고 거창한 용어를 가져다 쓰게 한다. 과시적 심리인 셈이다. 그 배경에는 이런 표현이 어딘지 현학적으로 보일 수도 있겠다는 그릇된 믿음이 자리 잡고 있기도 하므로 조심해 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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