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선·대선 때마다 '철수설' 되풀이될 수도
구조조정 비용과 편익 냉정하게 따져봐야
장창민 산업부 차장
[ 장창민 기자 ]
2020년 1월 초. 배리 엥글 미국 제너럴모터스(GM) 해외사업부문 사장이 극비리에 방한했다. 그는 기획재정부와 산업통상자원부, 금융위원회, 산업은행 등을 돌며 ‘한국GM 생존 계획(viability plan)’을 설명했다. 한국GM의 중장기 생존을 위해선 한국 정부와 산은의 자금 지원이 필요하다는 청구서를 내밀었다. 수천억원 규모다. 지원을 거부하면 짐을 쌀 수밖에 없다고 했다.
한국경제신문은 같은 달 GM이 2018년에 이어 정부에 또다시 자금 지원을 요청했다는 사실을 대서특필했다. 정부는 이를 부인했지만 이틀도 안 돼 사실로 밝혀졌다. ‘GM 철수설’의 망령이 되살아나는 순간이었다.
GM은 곧바로 중대 발표를 했다. 연말까지 경남 창원공장을 폐쇄하겠다고 했다. 부평 1·2공장을 통폐합해 단일 공장으로 운영한다는 계획도 내놨다. 연 50만 대 생산 체제를 30만 대로 축소했다. 2018년 군산공장 폐쇄에 이은 조치로 ‘단계적 철수’가 현실화한 것이다.
한국GM 노동조합은 즉각 반발했다. 정부는 태스크포스(TF)를 구성했다. GM에 대한 여론은 좋지 않았다. 2018년 산은이 유상증자를 통해 5000억원을 투입한 지 2년도 지나지 않아 또 손을 벌렸기 때문이다. 정부 내에서도 이번엔 강하게 나가야 한다는 의견이 많았다. 시장에서는 GM의 행태에 분노하는 목소리가 커졌다.
국민 정서와 달리 현실은 엄혹했다. 15만 명의 일자리가 달린 상황에서 어느 누구도 GM에 “나갈 테면 나가라”고 엄포를 놓지 못했다. 시점도 묘했다. 4월15일 총선을 앞둔 상황이었다. 인천과 창원 지역 정치인들이 들고 일어났다. 노조는 머리띠를 매고 파업에 나섰다. GM은 노조에 화살을 돌리고 정부에 중재를 요구했다. 어느새 한국GM 사태는 정부와 노조의 싸움으로 바뀌었다.
GM은 꽃놀이패를 쥐었다. 노조가 드러누우면 전면 철수 카드를 꺼낼 태세였다. 그래봐야 수년 뒤로 예정된 철수 시기를 앞당기는 것일 뿐이다. 정부가 노조를 달래면 자금 지원을 받을 공산이 컸다. 우여곡절 끝에 노조는 자구안을 받아들였다. 정부와 산은은 추가 자금 지원을 약속하고 GM을 붙들었다.
다시 2년이 흘러 대통령선거를 앞둔 2022년 새해 초. 이번엔 메리 바라 GM 회장이 한국행 비행기에 올라 탔다. 2018년과 2020년의 데자뷔였다.
올해 벌어진 한국GM 사태에 대한 추억을 담아 떠올려본 상상이다. 지금은 2018년이다. 한국GM 노사는 진통 끝에 뼈를 깎는 자구안에 합의했다. 자금 지원 규모와 방식을 놓고 정부와 GM이 막바지 협상을 벌이고 있다. 기업 구조조정에 ‘정답’은 없다. 누군가는 피를 흘려야 한다. 산은이 GM의 요구대로 돈(국민 세금)을 넣으면 수십만 명의 일자리를 당분간 지킬 수 있다. 요구를 거부하면 GM은 한국에서 짐을 싸고 수십만 개의 일자리가 사라지게 된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기자는 이동걸 산은 회장이 내세운 ‘가성비론(論)’에 동의한다. ‘비용(자금 지원) 대비 사회적 편익(일자리 유지 등)이 크면 된다’는 기업 구조조정 원칙 중 하나다. 다만 정부와 산은이 언제까지, 얼마의 돈을 들이는 게 맞는지는 냉정하게 따져봐야 한다. GM이 10년간 묵묵히 남아 있을 것으로 기대하면 곤란하다. 기자의 상상대로 앞으로 총선과 대선을 앞두고 올해와 같은 사태가 되풀이된다면, 그때 결정하기엔 너무 늦다. 언젠가 GM은 한국을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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