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덕적 행위는 이성이 아니라 감정에서 생긴다"
흄은 도덕이 타인에 대한 관심을 전제한다고 봤죠
인간의 감정은 수시로 요동친다. 사소한 일에 상처를 받고 분을 내고 또 다른 작은 일에 금방 웃음을 터뜨리는가 하면 어떤 때는 하늘을 날 것 같은 기분에 빠지기도 한다. 이처럼 감정은 인간을 변덕쟁이로 만든다. 그래서 전통적으로 이성주의 철학 자들은 감정을 이성에 의해 통제되어야 할 대상으로 보고 인간의 행위에서 감정보 다 이성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감정의 역할을 탐구
그러나 이와 같은 이성주의자들의 입장에 대한 반박을 자신의 철학적 임무로 삼고 감정이 인간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지, 감정의 역할과 그 중요성을 탐구한 경험주의 철학자가 바로 흄이다.
이를 위해 흄은 자신의 경험주의 인식론으로부터 논의를 시작한다. 흄은 관념이 인상에 기초하고, 인상은 감각의 결과라는 그의 인식론적 입장을 도덕의 영역에서도 그대로 적용하고 있다. 즉, 도덕적 관념 역시 도덕적 인상의 결과라는 것이다. 여기서 도덕적 인상이란 기본적으로 어떤 사물이나 사람에 대하여 한 사람이 주관적으로 느끼는 감정을 말한다. 이와 같은 감정을 갖는 것의 결과로 인간은 감정의 대상들을 추구하거나 회피하게 된다. 따라서 어떤 대상이 한 사람에게 그 대상에 대한 욕구를 불러일으킬 경우 그 사람은 그 대상을 획득하려고 노력하는 동기를 지니게 된다. 여기서 그 대상에 접하였을 때 자신의 감정이 이끌리면 그 대상은 덕스러운 것이 되고, 반대로 감정이 이끌리지 않는다면 그 대상은 사악한 것이 된다.
이성주의를 비판하다
감정의 형성에 대한 이와 같은 흄의 논의는 도덕 영역에서 이성주의의 입장을 비판하는 근거가 된다. 흔히 사람들은 이성의 작용으로 생겨난 지식이 인간 행위의 동기를 제공한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우리는 상한 음식을 보면 먹지 않는다. 이에 대해 우리는 상한 음식을 먹으면 병에 걸린다는 지식이 그 음식을 먹지 않게 하는 근거를 제공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흄이 보기에 우리가 상한 음식을 먹지 않는 이유는 그것을 먹고 병에 걸리면 아프다는 고통의 감정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바로 이러한 고통에 대한 예상이 상한 음식을 먹지 않는 행위의 동기를 결정한다는 것이 흄이 말하고자 하는 요지다. 그리하여 인간은 어떤 대상에서 고통이나 쾌락을 예상할 때 이에 맞는 감정을 느끼게 되는데, 그에 따라 인간은 그것을 피하거나 받아들이거나 하는 선택을 한다고 흄은 말한다. 그렇다면 도덕의 영역에서 이성의 역할은 무엇인가?
“이성은 정념의 노예이다”라는 흄의 유명한 말 속에는 감정과 관련하여 이성의 역할이 압축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흄에 따르면, 인간 행동의 동기는 정념이다. 감정에 따라 일어나는 생각을 ‘정념’이라고 하는데, 흄이 말하는 정념은 욕구, 혐오, 비탄, 기쁨, 희망, 두려움, 긍지, 겸손, 사랑, 증오 등을 포괄하는 개념이다. 이와 같은 정념에 따라서 사람들은 자신이 추구하는 목적을 정한다. 어떤 목적이 주어졌을 때 주어진 목적에 도달하는 수단을 찾아내는 데 도움을 주는 것이 바로 이성이다. 이 점에서 흄은 이성을 정념에 봉사하는 노예일 뿐이라고 말한 것이다.
그런데 흄의 말대로 인간 행위가 이성에 의해 옳고 그름을 판단해서 그것에 따라서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감정의 지배를 받는다면, 인간 행위의 근거로서 감정의 보편성은 확보될 수 있는가? 흄에 따르면 인간은 타고난 공감의 원리를 통해 다른 사람과 정서를 공유하고, 자신의 감정을 교정하여 보편적인 도덕감에 따라 도덕적으로 행위할 수 있는 존재이다. 흄이 보기에 인간은 각각의 감정을 공유하게 해주는 심리적 기제인 공감을 통하여 타인이 행복과 불행을 함께 느낄 수 있으며, 자신과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들의 행위에도 칭찬 또는 비난을 할 수 있다. 이는 마치 하나의 현이 울리면 같은 음을 내는 다른 현들도 이에 공명하는 것과 같다고 흄은 말한다.
도덕은 타인 관심을 전제
흄에 따르면 도덕은 타인에 대한 관심을 전제한다. 인간이 자기의 쾌락과 고통에 대해서만 예민할 뿐 타인의 기쁨과 슬픔에 대해 무관심하다면 도덕은 처음부터 불가능할 것이다. 이런 점에서 도덕 행위가 이성이 아니라 감정에서 유발된다고 갈파한 흄의 통찰력은 더욱 의미가 있다. 그러나 “남의 고뿔이 내 손톱 밑의 가시보다 못하다”는 속담이 괜한 말이 아닌 현실을 볼 때, “웃는 자들로 함께 웃고 우는 자들로 함께 우는” 따뜻한 공감 능력을 가진 그런 사람들은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시대의 요청이다.
◆기억해주세요
이성주의 철학자들은 감정을 이 성에 의해 통제되어야 할 대상으 로 본다. 하지만 흄은 감정의 역 할과 그 중요성을 탐구한 경험주 의 철학자다.
김홍일 < 서울과학고 교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