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자 과거 행적은 감출 수 없어
'김기식 사태', 자신에 관대한 대가
시민단체 등 新권력 반면교사 돼야"
오형규 논설위원
세상에 못 믿을 게 사람의 입이다. 혼자 깨끗한 척, 정의로운 척하는 사람치고 뒤가 구리지 않은 경우를 못 봤다. 차라리 작고한 마광수 교수가 솔직했지 싶다. 포장된 허위의식은 언제든 들통 난다.
믿고 싶은 것만 믿는 ‘탈(脫)진실(post truth)’ 시대여도, 정치인의 진면목은 말이 아니라 행동에서 드러난다. 19대 국회의원을 지낸 김기식 금융감독원장이 그렇다. 그는 자타가 공인한 재벌·금융개혁 전사(戰士)였다. 기업인과 기관장을 추궁하는 기술이 남달랐다. 그의 임명으로 장하성 청와대 정책실장,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 등 참여연대 삼인방이 ‘개혁 삼각편대’를 이뤘다는 평가도 나왔다.
그런 인물이 알고보니 ‘내로남불’의 전형이었다. 말과 행동이 달라도 너무 다르다. 피감기관 돈으로 간 외유성 해외출장이 여러 번이다. 임기 막판 ‘땡처리 외유·후원’, 4년간 세비로 재산을 3억원 이상 불린 재테크 솜씨는 혀를 내두르게 한다. 정의당과 경실련조차 외면할 정도다.
하지만 과거 행적은 감출 수도, 감춰지지도 않는 게 요즘 세상이다. 장삼이사(張三李四)의 하루도 통화내역, 신용카드 전표, 위치추적 등으로 얼마든지 재구성이 가능하다. CCTV에 하루 평균 83.1회 찍히고, 거리에선 9초마다 한 번꼴로 포착된다. 700만 대가 넘는 차량 블랙박스를 빼고도 그렇다.
하물며 권력을 쥔 자들이 혈세를 쓰며 돌아다닌 행적이 은폐될 수 있을까. ‘적법한 공무 출장’이란 해명은 출장비용 보고서에 첨부된 관광코스 영수증 한 장에 뒤집혔다. 국회 발언록과 정치자금 회계보고서는 그의 발목을 잡은 부메랑이었다.
문재인 정부의 국정과제 1호가 ‘적폐청산’이다. “네가 지난 정권 때 한 일을 알고 있다”는 집요한 추궁으로 두 전직 대통령을 구속시켰다. 하지만 적폐청산은 현 정권도 똑같이 해당된다. 그게 국민 눈높이다. ‘지지율=국민 눈높이’라고 여기면 크나큰 오산이다.
국민 눈높이는 캔커피, 카네이션 하나도 찜찜해 하는데, 사퇴 여론을 ‘개혁 저항’이라며 감싸는 여권 인사들은 국민을 또 한 번 욕보이는 것이다. “포르노를 정의하긴 어렵지만 보면 안다”(스튜어트 포터 미국 연방대법관)고 했듯이, 국민은 공직 적격자를 정의할 순 없지만 보면 안다. 공직을 맡겠다는 인물도 스스로를 알 것이다. 모른다면 낯 두껍고 속은 시커먼 ‘후흑(厚黑)’일 뿐이다.
권력과 갑질로 살아온 이들은 ‘미래’가 아니라 ‘과거’가 더 불확실한 세상이 됐다. 미투와 적폐청산, 인사검증이 같은 맥락이다. 과거의 위법·탈법·부도덕은 더이상 ‘괘념치 마라’, ‘관행이었다’식 변명으로 덮지 못한다. ‘김기식 사태’는 권력의 핵심이 된 ‘제5권력’(시민단체)이 이제야 검증 도마 위에 올랐음을 상징한다.
사람은 이중적이다. 미국 뉴욕대 조너선 하이트 교수는 호모 사피엔스를 ‘호모 듀플렉스(Homo Duplex·이중적 인간)’라고 정정했다. 개별 존재면서 동시에 사회 일부여서, 두 차원의 사회적 감성을 지녔다는 얘기다. 그렇듯 잇단 인사 참사는 타인에게 엄격하고 자신에게만 너그러운 데서 나온다. 그 간극만큼 대가도 커진다.
여전히 ‘투명사회’로 가는 길은 멀다. 하지만 거듭된 ‘인사 참사’의 부수효과도 있다. 인사청문회에서 탈탈 털리는 선배들을 지켜본 관료출신은 심각한 결격사유가 거의 없다. 20년 가까이 신상털기로 누적된 ‘청문회 효과’다.
마찬가지로 시민단체, 노동계, 폴리페서 등 신(新)권력집단에는 반면교사로서 ‘김기식 효과’가 상당할 듯싶다. 대기업 주식으로 재테크 한 소액주주 운동가, ‘창조적 절세’의 덕을 본 자칭 경제정의론자 같은 형용모순도 앞으론 쉽게 못 넘어갈 것이다. 적어도 혼자 정의로운 척하지 않든지, 공직을 맡지 않든지.
‘역사에 지름길은 있어도 비약이나 생략은 없다’는 격언은 개인사에도 들어맞는다. 제대로 숙성이 안 되면 발효가 아니라 부패가 된다.
oh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