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있는 삶'보다 저녁거리 살 돈이 중요… 일 더하게 해주세요"

입력 2018-04-11 17:40
수정 2018-04-13 14:28
근로시간 단축… 근로자들의 '하소연'

靑에 쏟아지는 근로자들의 '주 52시간 반대' 호소

더 일하고 주말근무도 해야
아이들 학원이라도 보내죠

여유시간 늘어나니 좋다?
일용직 알바로 '투잡' 뛰어야

퇴직 얼마 안남았는데…
퇴직금도 수천만원 줄 판


[ 문혜정 기자 ]
주 52시간 근로제를 제대로 준비하고 있는 중견기업은 거의 없다. 기업인들은 이에 대해 물으면 다들 “죽겠다”고 한다. 그러나 실명으로 거론되는 것은 손사래 친다. 정부 정책에 반하는 것으로 비쳐질까 걱정한다. 기중현 연우 대표가 청원한 것은 그래서 이례적이다.

하지만 근로자들은 다르다. 당장 월급이 줄어 생활에 지장을 받게 될 그들은 청와대 청원게시판으로 향한다. 이 게시판에서는 생생하고 절절한 그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저녁 먹을 시간이 필요한 게 아니라 저녁거리를 살 수 있게 일 좀 더 하게 해주십시오.” “더 일하며 주말근무하며 살고 싶다. 그래야 아이들 학원이라도 보낼 수 있으니까.” 이들은 주 52시간 근로제가 누구를 위한 정책인지를 묻고 있다.

대리기사 편의점 알바 뛰어야

7월부터 주당 근로시간이 52시간으로 줄고, 이에 따라 임금이 감소하는 것에 대한 근로자들의 공포감은 이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다. “‘저녁이 있는 삶’을 위한 정책이 ‘투잡(two-job)과 아르바이트가 있는 삶’으로 대체될 것이다.”

이런 호소를 가볍게 여길 수 없는 이유는 피해가 대기업 근로자 또는 연봉제 사무직이 아니라 중소·중견기업의 생산직과 시급 근로자에게 집중된다는 점 때문이다. 초등학교 2학년 아들을 둔 경북 구미에 거주하는 한 주부는 “기존 2교대 근무가 3교대 근무로 바뀌면 월급의 50% 정도가 깎인다”며 “회사는 법으로 정해진 거라 연장근무 특근 모두 못하게 하는데 자기 의사대로 돈을 벌 수 없는 현실이 답답하다”고 했다. 최저임금이 올라도 상여금이 깎이거나 근로시간이 줄어들면 의미가 없다고 덧붙였다.

제조업체에 근무하는 한 근로자는 “최저임금이 인상되자 회사가 이미 올해 보너스(상여금)를 깎았는데 여기에 근로시간까지 줄어들게 된다. 일부러 돈 벌려고 힘든 주·야간 2교대 생산직을 선택했는데 앞날이 막막하다”고 하소연했다. 또 다른 청원자는 “저녁에 대리기사를 하든지 주말에 일용직 일자리를 구해야 한다”고 했다.

퇴직금이 급속히 줄어드는 것을 걱정하는 목소리도 있었다. 한 청원자는 “30년 가까이 일하면서 퇴직금 하나 바라보며 노후를 준비하려 했는데 실질 임금이 월 100여만원 줄게 되면 퇴직금 수천만원이 적어진다”고 했다. 퇴직금은 퇴직 전 3개월 임금을 기준으로 계산하기 때문이다.

지난 대선에서 문재인 대통령을 뽑았다고 소개한 한 여성 청원자는 “제가 정책에 의해 ‘살아가지는’ 사람이라면, 글(청와대 게시판)을 읽으시는 분들은 정책을 만들고 대한민국을 이끌어가는 분들”이라며 “머릿속에는 닥쳐올 빈곤의 황량한 풍경이, 마음에는 두려움이 가득하다”고 자신의 심경을 표현했다.


월소득 평균 30만~80만원↓

이들이 호소하는 임금 감소는 현실화될 가능성이 높다는 게 기업인들의 말이다. 제조업체 조립라인에서 최저임금 수준의 시급을 받는 근로자를 기준으로 계산해봤다. 작년 기본근무 40시간, 주중 12시간, 주말특근 16시간 등 총 68시간을 근무했다고 가정하면 이 근로자의 임금은 월 210만~240만원이 된다. 특근 계산방식에 따른 차이다. 이 근로자가 올해 52시간 근무했다고 가정하면 임금은 174만원에 그친다. 16.4% 인상된 최저임금을 적용한 계산이다.

중견기업들도 생산직 근로자들의 평균 임금이 월 30만~80만원 정도 줄어들 것으로 보고 있다. 다만 구체적인 임금 감소분은 기업 상황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근로자의 업무 성격과 경력, 직책, 주중 야근 연장근로와 주말특근 배분 등에 따라 다르다. 주말특근과 잔업수당에 대해 기본 시급의 2배를 지급하던 중견기업이라면 차액은 더 커진다. 기본근로 40시간 이외 28시간(야근 12시간+주말 16시간)까지 가능했던 추가 근로시간이 12시간(주중 야간 근로+주말특근)으로 준 데다 주로 평일 야근에 집중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질 월급이 300만원에 육박하는 경우 많게는 150만~180만원 소득이 감소한다는 주장도 청와대 게시판에 올라와 있다.

기업들도 대책 마련에 분주하다. 일부 생산 공정을 쪼개 별도 회사를 설립해 직원 수를 300인 미만으로 조정하거나, 공장 내 일부 라인을 다른 회사에 (설비) 임대해주는 방안 등을 고민하는 회사가 많은 것으로 알려졌다.

한 건축자재 업체는 자체 생산량을 줄이고 외부 하청을 늘리는 방안을 추진 중이다. 이 업체 대표는 “예를 들면 생산 협력업체 수를 기존 10개에서 20개로 늘리고 경영사정에 따라 하청 물량을 조절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말했다. 평일 저녁과 주말에 설치 수요가 많은 가구업계에선 설치·시공 기사들을 계열사(별도 법인)에 소속시키거나, 이 업무를 외주를 주겠다는 업체도 나오고 있다.

문혜정 기자 selenmoo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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